오마이뉴스 게재, <죽음에 관한 철학적 고찰> 서평
[김성호의 독서만세 123] <죽음에 관한 철학적 고찰>
모든 인간은 죽는다. 변하는 모든 존재에게 끝이 있듯이, 삶 가운데 선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평생토록 걸어온 길의 끝에서, 온전한 첫 경험을 달갑고 노련하게 맞이할 인간은 결단코, 아무도 없다.
모두가 죽는다지만 정작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한다. 죽어본 적도 없고 죽음에서 돌아온 인간을 만나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가 죽음이란 문제를 두고 답을 구한 게 벌써 십 수세기지만, 우리는 여전히 죽음을 모른다.
'죽음 뒤에 또 다른 세계가 있어 오늘의 내가 이어진다'고 믿는 이와 '죽음은 삶과의 완전한 단절이며 그 뒤엔 무엇도 없다'고 믿는 자, 아예 죽음을 제쳐둔 채 오늘을 사는 사람이 한 세상에 산다. 손바닥만 한 컴퓨터로 뭐든 척척 해결하는 물음표 없는 세상에서 이처럼 알 수 없는 게 또 있나 싶다.
그러나 모든 삶이 필연적으로 통과하는 죽음을 빼놓고서 삶을 완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삶 가운데 얻는 무엇이 죽음 뒤로 이어지는가를 알게 된다면 우리 중 가장 저축하지 않는 이조차 삶을 다시 돌아볼 게 틀림없다. 죽음에 대한 이해는 곧 삶의 의미와 통하는 것이다. 수확에 대한 희망 없이 씨앗을 뿌리는 칸트주의자가 아니고서야 죽음에 완전히 무관심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구인회의 <죽음에 관한 철학적 고찰>은 죽음에 대한 철학계의 도전을 300여 페이지에 걸쳐 정리한 책이다. 고대 자연철학부터 하이데거, 아도르노 같은 현대철학자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탐구한 작업을 죄다 모아 소개했다.
장을 나눠 언급된 철학자만 해도 피타고라스, 플라톤, 에피쿠로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 데카르트, 쇼펜하우어, 포이어바흐, 니체 등 십 수 명에 이른다. 죽음이란 주제로 돌아본 철학사 총정리라 불러도 될 정도.
이들은 때로 인류의 시선에서, 때로는 개인의 시선에서 죽음을 바라본다. 인간의 인식이 한 번도 넘어본 적 없는 지평을 향해 더디지만 끝없이 전진한다. 먼저 가다 쓰러진 이의 공을 딛고 뒤에 가던 이가 조금씩 더 멀리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 가운데 가장 멀리 간 이의 시선으로 죽음을 바라본다.
아마도 우리는 이 책을 읽은 뒤에도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가장 멀리 도달한 철학자의 걸음도 죽음을 아는 데는 미치지 못했으므로. 하지만 죽음을 탐구하는 과정을 대하는 건 충분히 가치 있는 경험이 되어줄 것이다. 죽음을 알지 못하면서도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게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테니 말이다.
검은색이 상복으로 변화된 의미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은 자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데 대한 태고의 두려움은 죽은 자들로 하여금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그들의 세계로 끌고 가지 못하도록 검은 옷을 입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죽음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로 하여금 우리를 잊도록 하려는 노력의 예다. 죽은 자들을 잊지 못하는 우리는 죽은 자들에게 우리가 현존하지 않을 것을 원한다. 우리를 죽은 자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려는 시도는 죽은 자들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노력으로 전환되었다. -57, 58p
쇼펜하우어에게 삶이란 욕망과 고뇌, 고통과 비참함으로 가득하다. 평범한 삶에서 인간은 고통과 무의미로 인한 염세주의에 빠진다. 순간적 욕망의 충족만 있을 뿐 지속적인 만족은 불가능하므로 인간은 고통받는다. 부단한 궁핍에 대한 투쟁이 인간의 삶이며, 궁핍이 해소되는 순간 다가오는 것은 권태다. 인간의 삶이란 욕망과 결핍, 갈망과 불만족, 궁핍과 권태 사이를 부단히 오가는 시계추와 같은 것이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고뇌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욕망이라는 파도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리고 고통받고 있다. 마치 거센 파도 위의 배와 같다. 인생을 그렇게 보는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은 음울하다. 세계는 온갖 악과 이기주의, 시기와 탐욕, 증오와 복수심, 파괴욕과 잔인성, 고통과 부조리,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인간 삶의 장소다. -175p
삶의 의지는 개인을 보존하려는 욕구로 표현되지만, 본래 종을 보존하려는 욕망의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나뭇잎이 지고 다시 돋아나는 것처럼 인간의 세대도 끊임없이 생멸한다. 삶의 의지가 표현하는 성욕과 개체의 교체 속에서 우리는 고통과 죽음을 경험한다. 개별적 존재는 유한하고 사멸하지만, 종으로서의 인간은 무한하며 영원히 지속된다. 죽음이란 인간을 삶에 집착하게 만드는 독이 될 수도 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해독제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죽음을 개체의 소멸 현상으로만 여기는가, 아니면 삶의 한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죽음과 진정한 화해를 통해 죽음을 이해하려 하는가에 달려 있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죽음을 배제함으로써 삶 자체로부터도 소외되게 만든다. 죽음은 오히려 개체성의 편협함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다. 삶의 의지의 부정은 현실적인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염세주의적 권고가 아니다. 오히려 삶과 죽음이 결코 상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주고, 현재의 나의 삶이 하나의 허상임을 깨달아 정신적 자유를 찾도록 하는 삶의 철학을 지향한다. -176, 177p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아직 죽지 않았고, 내가 죽은 후에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경험할 수도 알 수도 없는 나의 죽음을 철학적 사색의 주제로 삼는 것은 일견 무의미해보인다. 그렇지만 죽음은 우리 삶의 최종적 귀결점이며, 죽음의 의미를 묻는 것은 삶의 의미를 묻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이 언젠가는 죽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죽음을 향해 가는 도정에 있는 존재로서 삶을 더욱 진실하게 대하게 되고 자기 삶의 의미도 더 진지하게 성찰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각자 삶의 내용을 결정한다. 죽음은 우리 삶의 종착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서 우리 삶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죽음의 의미를 묻는 것은 곧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이며, 죽음을 바라보는 의식은 삶을 바라보는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192p
마르셀은 인간이 자신의 육신과 맺는 관계에서 어떤 이중성을 본다.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내가 소유하는 것으로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더욱 심오한 의미에서는 나의 육신은 그렇게 다루어지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육신이기 때문이다. 마르셀에게 이것은 육화된 인격에 관한 핵심주장이다. 내가 나의 육신이라는 것은 바로 상호인격의 현존에서 나타난다. 상호인격 안에서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추상적인 정신으로서가 아니라, 자유와 타인에 대한 배려를 통해서 일종의 인격으로서 구체적인 육신을 가지고 다가간다. -277, 278p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