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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Nov 03. 2022

금기 없던 사상가의 불온한 걸작을 읽다

오마이뉴스 게재, <불온한 철학사전> 서평

[김성호의 독서만세 126] '불온한 철학사전'


한 권 책으로 시대를 읽어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로마 공화정을 이해하기 위해 키케로가 남긴 말과 글을 읽고,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알기 위해 공자의 말을 모아놓은 <논어>나 사마천의 <사기>를 읽는다. 15세기 유럽 인문주의에 관해서라면 에라스무스가 제일이고, 20세기라면 조지 오웰보다 나은 선택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18세기 서구 계몽주의는?


나는 볼테르의 <불온한 철학사전>을 권한다.

             

▲  "불온한 철학사전" 책표지ⓒ 민음사


이 책은 18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 볼테르의 글 모음집이다. 디드로, 달랑베르가 주도하고 볼테르 자신도 직접 참여한 <백과전서>에서 영감을 얻어 아흔 한 가지 주제를 놓고 글을 써내려갔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논의를 전개하는 볼테르 특유의 거침없음은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다. 종교와 역사, 신화와 과학을 오가는 볼테르의 방대한 지식이 독자를 매력적인 독서로 이끈다.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인권을 향한 지향을 놓치지 않는 그의 태도는 250년이 넘게 흐른 오늘의 독자에게까지 공감을 일으키기 충분하다.


볼테르는 수백 년 간 유럽 전체를 장악했던 전근대적인 종교의 억압이 허물어지는 격변기를 살았다. 칼뱅과 루터에 이어 유럽 각지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물리학을 앞세운 과학이 종교의 가림막을 벗어나 대중들과 만났다. 출판물이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로 활발하게 인쇄됐으며 지식이 국경을 넘어 전파됐다. 지난 시대의 방식으로 통치하려는 귀족들과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기다리는 민중들의 갈등이 깊어졌다.

 

인간과 멧비둘기, 그리고 비둘기가 입맞춤을 알고 있는 유일한 동물들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바로 이로부터 콜롬바팀이라는 라틴어가 생겨났는데, 이 말을 우리 언어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남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연이 입술을 위해 예비했던 입맞춤은 그러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 같지 않은 다른 점막 조직에 종종 자신을 팔아넘겼다. 성당 기사들이 무엇 때문에 비난당했는지 알지 않는가. 우리로서는 이 흥미로운 주제를 곧이곧대로 미주알고주알 펼쳐 보일 수가 없다. 비록 몽테뉴가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죽이다', '피 흘리게 하다', '배신하다'라고 서슴없이 소리 내야 한다. 한데 그에 대해 우리는 겨우 입안에서 어물거릴 뿐이다."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172p 


민음사는 지난 2015년 이 책을 엮어 내놓으면서 볼테르를 '언론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목숨 건 지식인'이라고 표현했다. '관용과 비판적 정신의 원류'라는 설명도 덧붙었다. 볼테르를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과분한 평가가 아니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오늘과 같은 언론의 체계가 잡히지 않은 18세기 유럽에서 볼테르는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 시민을 대상으로 활발한 집필 활동을 벌였다. 그는 글을 무기로 종교와 국가권력 등 인간 본연의 권리를 위협하는 모든 압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볼테르의 펜 끝엔 금기가 없었고 그는 기꺼이 그로 인한 위험을 감수했다. 당대 권력자들의 미움을 사 프랑스와 영국, 프로이센, 스위스 등을 떠돌면서도 부조리라면 어떤 것이라도 참아내지 않았다. 조롱과 도발, 비판과 비난을 넘나드는 그의 글은 대중의 무지를 기틀 삼는 기득권층에겐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했다. 자연히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이가 늘어갔지만 볼테르에겐 오히려 명예로운 일이었다.


<불온한 철학사전>이 다룬 아흔 한 가지 주제는 거창하고 관념적인 것부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까지를 막론한다. 당대에 논란이 되는 사건을 논하고 위정자와 법질서를 비판하며, 문화를 찬양하고 위선을 꼬집는다. 재기발랄한 표현으로 가득한 볼테르의 글은 읽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쾌감을 준다. 글 안에 담긴 뜻과 시선을 곱씹는 건 그보다 더한 재미다.


다만 여성과 다른 인종에 대한 편견 깃든 시선은 예민한 독자에겐 불편을 자아낼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지금보다 250년 앞선 이의 저작이라는 점과 인류가 낳은 가치 있는 고전 대부분이 시대적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조금쯤 관대해질 수도 있을 테다.


일찍이 폴 부르제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볼테르만큼 전 생애에 걸쳐 생각하는 대로 살아간 인물은 몇 알지 못한다.


볼테르는 이 책에서 "예술과 기술에 대해서라면 독자를 가르쳐야 하지만, 도덕에 대해서라면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도록 놔두어야 한다"고 적었다. <불온한 철학사전>의 가장 큰 미덕은 독자로 하여금 볼테르가 논한 주제들을 깊이 생각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그로부터 우리 자신의 도덕을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맨더빌은 젊은 두 여자가 만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서로 상대방에게서 비웃어 줄 만한 흠을 찾아내는 것이며, 두 번째가 듣기 좋은 아첨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시기심이 없을 경우 기예(技)는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미켈란젤로에 대한 질투심이 없었더라면 라파엘로는 위대한 화가가 되지 못했으리라는 말이다.
맨더빌은 경쟁심을 시기심으로 착각한 것이 틀림없는데, 어쩌면 경쟁심 역시 품위의 틀 안에 갇힌 시기 시기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시기심 덕분에 당신은 나보다 더욱 열심히 기량을 연마할 수 있었소. 당신은 교황 가까이 있으면서도 나를 결코 헐뜯은 적이 없고, 음해하지도 않았소. 또한 내가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천국에 애꾸눈과 절름발이를 그려 넣었다는 것을 꼬투리 잡아 나를 파문하려는 음모에도 가담하지 않았소. 그러니 당신의 시기심은 매우 칭찬할 만하오. 당신은 정직한 시기심을 가졌소. 우리 좋은 친구가 됩시다." -251, 252p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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