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만만한 노엄 촘스키> 서평
[김성호의 독서만세 132] 데이비드 콕스웰 '만만한 노엄 촘스키'
전공인 언어학을 비롯해 국제관계와 미디어 등의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저작을 다수 남긴 노엄 촘스키 소개서다. 일찍이 <뉴욕타임스>가 "생존 지식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평했고, <시카고트리뷴>은 "생존한 저자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물"이라고 소개했으니 촘스키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게 쓸데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올해로 아흔 하나가 된 촘스키는 두 가지 분야에서 정점에 오른 드문 이력의 소유자다. 하나는 언어학. 촘스키는 언어를 습득하는 인간의 능력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생득적 요소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이론을 통해 입증하려 했다. 문법론을 중심으로 한 그의 연구는 기존 언어학 방법론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학계에선 이 같은 현상을 '촘스키 혁명'이라고까지 불렀다고 한다.
언어학계의 근간을 흔든 촘스키는 이후에도 자신의 이론을 꾸준히 수정·발전시켜 전무후무한 업적을 쌓아올렸다. 작금의 언어학계가 촘스키의 접근법을 따르는 형식주의자와, 다른 방법론을 모색하는 기능주의자로 갈려 있고, 둘 모두 촘스키의 업적과 공헌을 부인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촘스키는 정치 철학자이자 사회비평가로서도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면 전공을 초월해 의견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데, 미디어를 통해 일회적인 의견을 발표하는 걸 넘어 학술적으로 심도 깊은 논의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촘스키의 글은 특유의 통찰력으로 정부와 미디어, 자본주의가 자행해온 기만과 조작을 직관적으로 드러내 엘리트 집단뿐 아니라 대중에 널리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활동에서 비춰지는 촘스키의 세계관은 미국의 정치상황에 비추어 매우 급진적이어서, 만약 그가 언어학에서 입지전적인 업적을 쌓지 못했다면 주류 사회에서 인정받기란 어려웠을지 모른단 평가가 많다. 하지만 촘스키는 무너지지 않는 업적을 쌓은 학자이자 남다른 통찰과 직관을 갖춰 대중적인 인기도 높다. 이로써 그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촘스키의 '불온한' 사상과 만나다
대중지향적인 정치서를 주로 써온 작가 데이비드 콕스웰은 촘스키 소개서라 할 만한 책 <만만한 노엄 촘스키>를 만화 다큐멘터리라 명명한다. 대중에 친숙한 만화라는 형식 위에 다큐멘터리적 기법을 녹여냈다는 뜻이다. 그는 이 책에서 촘스키의 개인적 삶과 언어학계에서 이룩한 업적, 미디어와 정부, 자본주의와 국제문제에 대한 촘스키의 날 선 비판을 두루 다루었다. 촘스키가 일생에 걸쳐 남긴 주요한 주장을 159쪽의 얇은 책 안에 압축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특별함이 있다.
책은 촘스키의 생애와 경력, 그가 영향을 받은 선배들, 언어학계에서 남긴 업적, 미디어에 대한 비판, 정치관, 시민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저항방식 등을 순차적으로 서술한다. 마지막엔 촘스키와 나눈 인터뷰가 짤막하게 실려 있어 책을 통해 접한 노엄 촘스키가 현재의 문제를 대하는 시각을 접할 수 있다.
미디어와 자유주의체제에 대한 촘스키의 입장을 정리한 부분은 특히 중점을 두고 읽을 만하다. 국내에도 이 분야에 대한 촘스키의 저서가 많이 나와 있지만, <만만한 노엄 촘스키>만큼 쉽고 종합적으로 이를 정리해주는 책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미디어에 대한 촘스키의 입장은 이렇다. 촘스키는 미디어가 민주적이기 위해선 공정하고 온전하며 편견 없이 보도해야 하고 권력의 남용에 맞서 파수꾼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만, 현대의 미디어가 이 모두에서 실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 이유로 미디어가 대중의 알권리에 봉사하기보다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기능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꼽는다.
미디어가 대중을 세뇌시키는 수단이라니
촘스키는 미국의 정치란 단지 국가의 통제권을 두고 경쟁하는 투자자들끼리의 상호작용에 불과하다고 본다. 국가란 하나의 기업과 같으며, 정치는 거대 기업과 이익단체, 엘리트집단이 마치 기업의 주요주주처럼 패권을 잡기 위해 경쟁하는 장이란 것이다. '국가를 소유한 이들이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국가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대중을 세뇌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를 생산하려 한다. 그 역할을 미디어가 수행한다.
촘스키는 에드워드 S. 허먼과 함께 쓴 <여론조작>에서 대중매체가 대중을 세뇌하는 프로파간다 모형을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가공되지 않은 뉴스 대신 편파적인 정보를 전달해 대중을 저들이 원하는 대로 세뇌시킨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촘스키에 따르면 뉴스는 크게 다섯 개의 필터를 거쳐 가공된 정보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는 다음과 같다.
하나. 미디어는 소수 거대 기업의 손에 들어가 있거나 그에 장악돼 있으며 다른 모든 기업과 마찬가지로 이윤을 얻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
둘. 광고를 수입의 주요원천으로 삼고 있는 상황
셋. 정부·기업·전문가 집단에 대한 의존성
넷. 정부와 기업으로부터의 압력
다섯. 국가의 종교이자 통제수단으로 작용하는 이데올로기
책은 촘스키가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 여러 사례를 들어 이러한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한다. 수도 없는 언론과 기업의 유착사례, 특히 전국적 방송과 신문 나아가 공영방송까지 장악한 기업의 모습은 충격적으로 느껴진다.
일례로 책은 공영TV인 WNET이 다국적 기업들이 제3세계에서 저지른 불법행위를 보도한 다큐멘터리를 내보낸 이후 벌어진 과정에 대해 서술한다. WNET 간부가 '소독'까지 해서 내보냈다는 이 다큐가 방연된 뒤 대기업 걸프 앤드 웨스턴(Gulf and Western)이 즉각 불쾌감을 드러내고 방송국에 재정지원을 중단한 것이다. 촘스키는 이런 사례를 통해 기업이 미디어의 보스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힌다.
17년 전 촘스키가 미국사회에서의 미디어를 분석한 이 내용은 오늘날 한국 언론의 현실과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삼성그룹의 비리를 취재하던 기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임의로 기사를 삭제해 촉발된 일명 '<시사저널> 사태', 삼성이 <한겨레>에 광고를 게재하는 조건으로 삼성을 비판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요구했다는 <미디어오늘>의 지난 1월 보도, 한국언론의 민낯을 까발린 '장충기 문자 청탁사건', 최근 <뉴스타파>가 보도한 <조선일보>와 기업 간의 기사거래 사태 등 이를 입증하는 증거가 수도 없다.
정부보조금이 부자에 대한 복지사업?
촘스키는 미디어가 이 같은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시민에게 몇까지 환각을 판다고 주장한다. 첫째, 이 나라가 소수의 부자들에 의해 소유·운영·통제되지 않는다는 것. 둘째, 미디어 역시 소유·운영·통제되지 않는다는 것. 셋째, 여론은 자유롭게 형성되며 강요되거나 속임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서구 민주주의가 여전히 왕족과 소작농,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어 있으며 주류 미디어는 이 사실을 감추고 있다는 게 촘스키가 미디어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책은 나아가 자유시장체제에 대한 촘스키의 생각도 적고 있다. 그는 자유시장체제는 거대한 사기극이며 미국의 경제는 조작됐다고 주장해 왔는데, 책은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미국에서 '자유시장체제'는 신성한 원리로 취급된다. 모든 경제문제들은 '자유시장'의 원리에 의해 치유가 될 것이라 떠벌려진다. 경쟁을 통해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최고의 상품을 최적의 가격에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된다.
자유시장은 항상 최고의 선택을 내리기 마련이고 가장 완벽한 사회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체제가 어떻게 기능을 하는지, 누가 세금을 내고 그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보조금의 혜택을 누가 가장 많이 누리고 누가 가장 적게 누리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유시장체제란 한낱 이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118쪽
책은 촘스키가 언급한 수많은 사례, 이를 테면 항공기제조사나 컴퓨터제조사가 정부의 전적인 지원을 받아 육성되고 운영된 사실을 언급한다. 촘스키는 클린턴 대통령 시절 정부지원의 혜택을 크게 보았던 보잉사와 크레이사가 자유시장체제의 성공모델로 홍보된 아이러니함을 지적하는데, 정부의 통 큰 지원을 받은 이들 회사의 성공이 공적자금을 부자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투입한 결과라는 것이다.
책은 이밖에 석유기업과 자동차 제조사, 타이어 제조사 등이 합작법인을 설립해 전차기업의 주식을 매수하고 45개 이상의 도시에서 전차와 선로를 해체한 사례 등을 통해 자유시장체제의 실패를 전면에 까발린다.
'공적 자금이 투입된' '정부 보조금'...? 이 단어들이 정확하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하다. 정말 단순하다. 거대 기업의 이름에 붙어 있는 '보조금'이란 단어는 부자들에 대한 복지사업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 122p
책은 이밖에도 '민주주의의 확장'과 '세계질서의 확립'이란 이름 아래 미국이 새로운 식민주의 체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촘스키의 주장을 소개한다. 중동·아시아·중미·남미 등을 무대로 여전히 엿볼 수 있는 미국의 외교정책을 촘스키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자, 그렇다면 소수 부자와 엘리트 집단에 의해 장악된 현실 세계에서 시민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과연 무엇일까. 촘스키의 답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만만한 노엄 촘스키>를 집어들 일이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