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용재총화> 서평
[김성호의 독서만세 134] 조선 초기 비평가 성현 지음 '용재총화'
조선을 제법 안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좋아해 읽은 책이 여럿이었고 조선을 다룬 영화며 드라마는 빼놓지 않고 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여겼다. 웬만큼 이름난 인물이라면 뒷이야기까지 한참을 떠들 수 있었고, 유명한 사건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읽은 책 <용재총화>를 보며 그와 같은 생각이 모두 깨졌으니, 내가 아는 건 역사일 뿐이지 그 시절 세상은 아니었다.
다재다능 사대부의 자유분방 글모음
<용재총화>는 조선 초기를 산 성현의 책이다. 다재다능하고 자유분방한 양반으로 세조부터 연산군까지 네 임금을 모시며 높은 벼슬까지 올랐다. 거침없는 성격과 높은 안목으로 학문과 예술, 음식과 지리 등을 자유롭게 논하여 탁월한 비평가로 평가됐다. 조선 초기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그의 이런 성향과 잘 어울렸다.
평생 많은 저작을 남긴 성현은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 책을 묶어냈다. 어린 시절 그 자신이 친구들과 겪은 일부터 민간의 풍속과 각종 풍문, 당대에 유명했던 일화, 사람과 작품에 대한 평론까지 다방면의 글을 한 책에 엮었다.
돌베개가 '우리고전 100선'의 22번째 작품으로 출간한 <용재총화>엔 모두 69편의 글이 실렸는데 그 성격과 내용이 워낙 다양해서 한 책에 실린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가장 큰 가치는 조선을 다룬 다른 책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성현이란 인물이 제 신변잡기부터 친구를 골탕 먹인 일화, 심지어는 온갖 풍문을 수집해 현실감 있게 적어 놓았다보니 자연스레 당대 시대와 사람의 모습이 가까이서 읽힌다.
중 속여 절 빼앗은 양반 이야기, 실화냐?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상도 선비 윤통이란 자는 익살맞고 입심이 좋은데다 사리사욕 챙기는데 주저함이 없어 남을 자주 속였다. 그가 부패한 중을 속여 제 집을 마련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윤통은 시주를 모으는데 능력이 있는 중을 불러다 절을 세워 덕을 쌓겠다며 함께 절을 만들어보자고 꼬드겼다. 중이 동의하자 윤통이 보시를 청하는 글을 직접 쓰고 중이 절을 짓기 위한 재물을 모았다.
그런데 윤통이 지휘한 공사가 조금 이상했다. 보통 절과 달리 온돌방을 많이 만들어놨고 황무지를 개간해 채소밭까지 마련한 것이다. 어찌됐든 절이 완성됐고 윤통은 중에게 아내와 식구들을 불러다 먼저 불공을 드려야겠다고 청했다.
문제는 찾아온 윤통의 식구들이 병을 핑계로 절에 눌러앉아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세간까지 모두 챙겨와 실제 집인지 절인지 알 길이 없었다. 자연히 중들이 절에 들어올 자리도 없었다. 중은 그제야 속았다고 느껴 관아에 소를 냈지만 유명한 선비였던 윤통을 당해낼 수 없었다는 결말이다. 성현은 윤통이 여든까지 장수했다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밖에도 책은 다양한 당시 이야기를 통해 당대 시대상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중국을 오가는 사신과 지방을 감찰하는 관리들이 기생들과 노는 이야기며 기생들이 양반을 꼬드겨 한몫 잡으려는 수작까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가끔은 음탕한 관리를 골탕 먹이는 인물들이 등장해 속 시원한 이야기를 빚어낸다. 당대 명사들까지 실명으로 등장하는 성현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당대 시대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한 듯싶다.
조선에도 비평가가 있었답니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건 성현의 비평이다. 성현은 음악가와 음악, 화가와 그림, 문장가와 시, 심지어는 서울의 명소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비평을 감행하는데, 여기서 드러나는 성현의 성향과 취향, 깊이와 안목이 5세기를 초월해 읽는 수준급 비평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 땅에서 비평을 업으로 삼으면서도 조선을 살았던 단 한 명의 비평가도 알지 못했던 나로선 꽤나 충격적인 만남이었다. 어째서 나는 그 긴 시간을 산 모든 이들이 제대로 된 비평을 내놓지 못한 채 숨죽여 살았으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나 뿐은 아닐 것이다.
성현이 이 땅의 선배 문장가를 평한 대목을 살펴보자. 그는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뒤로 문장을 잘 짓는다는 명성을 크게 떨쳤다면서도 '시구를 잘 짓긴 하지만 뜻이 정밀하지 않고, 비록 사륙문을 짓는 솜씨가 공교롭긴 하지만 어휘가 정돈되어 있지 않다'고 적고 있다.
고려의 김부식에 대해선 '넉넉하지만 화려하지는 않'다고 평하며 정지상은 '찬란하지만 굳건한 기운을 드날리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이규보는 '글을 전개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잘 수습하지는 않고', 이인로는 '자구를 잘 단련하지만 글을 펼쳐나가는 필력은 부족하다'고 평가된다. 임춘과 이제현, 이승인, 정몽주, 이색 등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명사들의 글 역시 모두 언급된다.
신숙주, 최항, 이석형, 박팽년, 성삼문, 유성원, 이개, 하위지, 서거정, 강희맹, 김수녕 등 조선 선배 문장가에 대해서도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문장가들인 만큼 칭찬이 주를 이루지만 부족한 부분에 대한 평가도 빠지지 않는다.
화가와 음악가에 대해선 더욱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산수화와 인물화에 모두 조예가 깊었던 배련이 인물화로 이름을 날린 최경을 인정하지 않아 둘 사이가 나빴다는 내용을 이 책이 아니라면 어디서 읽을 수 있겠나. 최경의 인물화는 안견의 산수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대 화풍을 주도했던 인물이지만, 강희안과 같이 뛰어난 화가는 늘 배련의 작품을 극찬하곤 하였다고도 적는다.
<몽유도원도>로 잘 알려진 안견의 그림 가운데선 <청산백운도>가 중요하게 언급된다. 성현이 승지이던 시절 궁에서 작품을 직접 보고는 감동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성현은 안견이 <청산백운도>에 대해 늘 이렇게 말했다고 적었다. "평생의 공력이 여기에 있다."
높은 안목으로 서울에서 경치 좋은 곳을 논하는 대목은 새삼 재미있다. 성현이 평가한 물 좋은 동네를 500년 뒤 직접 가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안에는 경치 좋은 곳이 적지만, 그중에 놀 만한 곳은 삼청동이 제일이다. 인왕동이 그 다음이고, 쌍계동·백운동·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
삼청동은 소격서 동쪽에 있다. 계림제에서 북쪽으로 가면, 맑은 시내가 소나무 사이에서 솟아 나온다. 물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산은 점점 높아지고 숲은 울창하고 바위 절벽은 깊어진다. 몇 리 안 가서 바위가 끊어지고 벼랑이 되면서 그 벼랑 틈으로 물이 뿜어 나와 흰 무지개를 드리우고 구슬이 흩뿌려지는 듯 물방울이 사방으로 튄다. (중략) 인왕동은 인왕산 밑에 있으니, 깊은 골짜기가 구불구불 이어진다. 복세암은 골짜기의 물이 합쳐져 시내를 이루니 서울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과녁에 활을 쏜다.
쌍계동은 성균관 위의 골짜기에 있다. 두 개의 시내가 합쳐져 큰 계곡을 이룬다. 김뉴가 시냇가에 집을 만들고 복사나무를 심어 무릉도원을 본떴는데, 강희맹이 이곳을 두고 부를 지었다.
- 207p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