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이 총을 쏘고 야산에 버린 비석

이충부공 기념비 방문기

by 김성호

일본군이 총탄을 쏘고 아예 뽑아서 야산에 던져버린 비석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린 유허비로, 이름은 다소 심심한 ‘이충무공 기념비’다. 비를 모신 건물은 모충각이라 부른다. 정면엔 각에 들고 나는 모충문이 있고, 그로부터 다시 오십 걸음쯤 떨어진 곳에 홍살문이 섰다. 그 사이엔 허리 긴 소나무 수십 그루가 대장선 탄 수군처럼 위세를 뽐낸다.


이곳 비석은 여느 충무공 기념물과는 다르다. 보통의 비가 장군의 전공을 기린다면 여기선 부족함 없이 군량을 마련한 공의 수완부터 전시 내정의 중요성, 이를 다루는 의미 등이 두루 담겼다. 전란이 끝나고 한 세기도 더 지난 뒤 통제사로 부임한 오중주와 충무공 5대손 이봉상이 직접 비를 세웠단 사연부터 남다르다. 내용을 모두 적을 수는 없으나 중요한 대목을 추려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군민의 소원은 그치지 않아 남은 비용으로써 비문을 새기고자 나를 찾아 왔기에 나 탄식하나니 그럴 일이다. 공의 원대하신 경륜이여 자고로 전쟁에 이김은 군량의 저축에 힘입지 않음이 없으니 옛 조영평이 금성의 강을 부숨도 황중의 둔전에 있었고 당나라 덕종이 봉천에서 주림을 면함도 한광이 실어온 쌀의 덕분이었으니 공이 여기에 진을 세운 것도 그 뜻이 이에 있도다.'


조영평은 강성하게 일어난 강족을 싸움 대신 내정으로 무너뜨린 중국 전한시대 영평후 조충국을 말한다. 무제 사후 위기에 봉착한 한나라가 중흥을 맞이한 건 이때 나라를 지킨 조충국 덕분인데, 그의 무공은 전투에서 적을 깨뜨리는 것이 아닌 성 안에 박혀 적의 자중지란을 의도한 데서 출발했다.


덕종은 지방 군벌의 세습을 막으려다 파천까지 한 당나라 황제다. 봉천은 그가 장안과 함양을 거쳐 야반도주한 곳으로, 잘은 몰라도 그에게 병량을 댄 게 여기 적힌 한광이란 인물인 듯하다. 조충국과 한광 모두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인물로 볼 수 있고 모두 전투가 아닌 군량과 관계됐단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석엔 또 이와 같은 문장도 있다.


'공의 하는 일이 눈앞의 일에만 그치지 않았으니 처음으로 전라좌수영을 맡았을 때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하심을 듣고 쌀 오백 석을 봉해 두고 이르기를 ‘임금이 의주에 피란해 계시니 평양의 적이 서쪽으로 쳐들어가면 임금은 다시 압록강을 건너실 터라 나의 직분으로 바다에 임금을 모셔 나라를 회복하거나 불행이면 군신이 같이 내나라 땅에서 죽어도 가하다’하였으니 이 말만으로도 어찌 공의 충성과 지략이 군량에만 그쳤겠는가. 한산도 고금도 사이에 진을 치고 돌보기 쉬운 곳에 둔전을 열고 군량을 두어도 급할 때 쓰기에 족할 것을 하필이면 귀빠진 이곳에 서울을 바라보고 진을 두었겠는가.'


요컨대 충무공이 고하도에 진과 둔전을 둔 건 수군의 일에 그치지 않는다. 장군은 이곳에서 병사를 훈련시키고 군량과 무기를 보강해 조정과 육군 본영에 지원했다. 이후 왜 수군이 움직이지 않자 본영을 남방으로 다시 옮겼으나 재건한 함대로 적을 도발하는 대신 전력 강화에 매진했다. 전쟁을 대하는 장군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증명하는 일이다.


이곳 유허비는 장군의 이러한 뜻이며 태도를 기리는 것이다. 눈앞의 전공에 매몰되지 않고 진정한 목표와 대의를 향해 정진하는 것, 그것이 고하도 진영에 담긴 함의다. 통제사의 책무를 넘어 나라를 향한 일을 하는 것, 그건 업을 대하는 충무공의 자세가 어떠한 지를 내보인다. 그 안에 담긴 미칠 듯한 자긍심까지도. 83대 통제사 오종주와 95대 통제사 이봉상이 비를 세운 것도 이와 같은 뜻을 새긴 비석이 다른 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공의 뜻을 가장 가까이 이해한 후예들이다. 이것이 공을 기리는 사람이 고하도 유허비를 찾아야 하는 이유다.


세상엔 공을 존경한다는 사람이 넘쳐나지만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전쟁에 임했는지를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 한산도와 울돌목, 그리고 노량에서 공이 처했던 상황이 모두 달랐고 그 때마다의 전략과 전술 역시 크게 변했다. 공을 이해한다는 건 각 상황을 대하는 자세며 판단을 이해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건 그리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이 같은 내용을 큰 돌에 새겨 마을 입구에 세운 건 오래도록 사람들이 드나들며 그 뜻을 깊이 생각하고 이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비석은 고하도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떨어져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2022. 8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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