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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Jun 18. 2023

암에 걸린 아내 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오마이뉴스 게재, <화장> 영화평

[김성호의 씨네만세 56] 임권택의 102번째 영화 '화장'


▲ 영화 <화장> 포스터 ⓒ 리틀빅픽쳐스


영화 <화장>은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다. 102편은 무려 50여 년 간 70편이 넘는 작품을 만든 미국 서부영화의 거장 존 포드와 비교해도 월등한 수치다.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로 손꼽힌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존 포드가 아니라 임권택을 먼저 알았다면 감히 작품 수로 최고가 되겠다는 강박적 야심은 품지 못했으리라.


때문에 임권택은 무시할 수 없는 한국 영화계의 자산이다. 과거 한국의 열악한 영화제작 환경 속에서 누구보다 많은 영화를 찍으며 고군분투해 온 그가 기술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급변한 2015년에 신작을 발표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단순히 영화 이상의 배움을 얻을 수 있다.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노장에 대한 예우는 결코 무조건적 찬사가 아니다. 카메라 앞에서 그는 다른 감독과 같이 진지한 열의로 가득찬 한 명의 연출자이고, 모든 연출자에 대한 최고의 예우란 작품을 진지한 자세로 바라보고 냉철하게 비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임권택의 99번째 영화 <하류인생>과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개봉 당시 평단이 그의 영화를 사실상 특별 취급한 것은 그래서 예우가 아닌 모욕에 가까웠다.


<화장>은 4년 만에 찾아온 임권택 감독의 신작이다. 개봉 3주 째인 27일까지 13만 8,229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박스오피스 11위에 올라 있다.


지금까지의 흥행성적은 기대보다 못하다. 당초 같은 날 개봉한 <장수상회>와 함께 한국영화 쌍끌이 흥행을 이끌 것으로 전망되었으나 지속적인 관객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김훈의 원작소설을 임권택 감독이 연출하고 안성기가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관심을 받기 충분했으나 무거운 주제와 분위기, 부족한 상영관 등이 발목을 잡았다.


본능과 양심 사이의 치열한 갈등을 그려내다

  

▲ 영화 <화장>의 한 장면. 오열하는 아내(김호정 분)와 부축하는 남편(안성기 분) ⓒ 리틀빅픽쳐스


영화는 투병 중인 아내와 마음을 흔드는 부하직원 사이에서 번민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중견 화장품 회사에서 중역으로 일하는 오 상무(안성기 분)는 아내(김호정 분)의 암이 재발하자 그녀를 4년 동안이나 헌신적으로 간병해온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미모의 여사원 추은주 대리(김규리 분)가 그의 팀에 경력직으로 입사하자 그는 남다른 호기심을 느낀다. 자연스레 호기심은 연모의 감정이 되고 오상무는 몰래 찾아든 사랑과 아내에 대한 책임 속에서 홀로 번민하고 고뇌한다.


영화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지만 남편이자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온 사내가 거의 본능이라 불러도 좋을 새로운 감정과 마주해 고뇌하는 모습을 담았다. 근래 활동이 뜸해지긴 했지만 누구도 연기력을 의심하지 않는 명품배우 안성기가 오 상무 역을 맡아 복잡한 내면을 깊이 있게 표현한다. 오 상무의 아내 역은 연극배우 출신 김호정이 맡았는데 이번이 무려 5년 만의 스크린 나들이다. 삭발과 노출을 마다하지 않는 그녀의 열의는 이 진지한 영화에 무시할 수 없는 깊이를 더해주었다.


<하류인생>에 출연하며 임권택 감독과 인연을 맺은 김규리는 오 상무의 마음을 흔드는 미모의 여자로 출연해 매력을 과시했다. 지난 작품들에서 수차례 파격적인 노출을 감행한 바 있는 김규리는 이번에도 상당한 수위의 연기를 펼쳤다. 노출을 감행하면서도 여배우로서의 이미지를 지켜나가는 그녀의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이 영화가 가치가 있다면 그건 바로 '연기' 때문

  

▲ 임권택과 안성기, 그리고 영화 스태프들 ⓒ 리틀빅픽쳐스


영화를 본 관객 가운데 상당수가 '영화가 소설 원작보다 못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야기의 특성상 사건보다는 인물의 감정 등 내면묘사가 중요한데, 아무래도 활자매체인 소설보다 영상매체인 영화가 전달에 있어 제약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제약을 고려하면 영화의 완성도는 그리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소설의 맛을 충분히 살리는 데는 무리가 있었으나 영화라는 별개의 작품으로 나름의 매력이 있었고 무엇보다 배우들의 깊이 있는 연기를 끌어내는 감독의 역량이 돋보였다 하겠다.


본능에 가까운 욕망과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남자의 내면을 깊이 있게 표현한 안성기.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감추지 못하는, 더불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참담함을 설득력있게 표현한 김호정. 오상 무의 따스함이 이성적 감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나서의 감정변화를 섬세하게 나타낸 김규리까지. 출연 배우 하나하나의 연기가 너무도 인상적인 영화였다. 여러모로 아쉬웠던 전개와 결말에도 이 영화가 가치가 있다면 그건 바로 연기 덕분일 것이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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