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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Sep 03. 2023

소수자의 관점으로 SF세계를 가로지른 흑인여성 소설가

오마이뉴스 게재, <블러드 차일드> 서평

[김성호의 독서만세 148]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


누구에게나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믿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그곳을 도달할 수 있는 세계와 구분지어 '한계'라고 부른다. 인간은 제 한계를 남에게도 적용하길 즐긴다. 나의 한계는 여기까지고 내가 아는 누구의 한계는 또 거기까지니, 너의 한계도 거기 어딘가쯤이어야 마땅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한계가 진실은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노를 젓길 거부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동굴 속에서 매일 밤 부싯돌이나 부딪고 있었을 테다.


SF문학의 굵은 기둥이 된 옥타비아 버틀러는 매순간을 자기의 한계와 부닥쳐온 인물이다. 처음 글을 쓰고, 첫 번째 SF소설을 완성하고, 완성된 글을 출판사에 팔고, 제 소설에 대한 비평과 맞닥뜨리는 모든 과정이 그에겐 한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SF문학계에 흔치 않은 여성 작가이며, 그보다도 더 희귀한 흑인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독하게 가난했던.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세계에 입문하기

  

동급으로 분류되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그녀의 소설은 한국에서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었다. 기존 SF문학 팬들을 중심으로 <킨> <야생종> <블러드 차일드> 같은 작품집이 보급되긴 했지만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까지 널리 읽히진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2006년 그녀가 사망한 뒤 본격적으로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출판사 비채가 가장 열성적으로 그녀의 소설들을 출간하고 있다.


비채가 2016년 출간한 <블러드 차일드>는 버틀러의 SF에 입문하기 가장 수월한 작품집이다. 통상 버틀러 문학의 정수라 하면 말년의 '우화' 시리즈를 꼽는 이들이 많지만 그가 다른 작가들과 얼마나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는 <블러드 차일드> 만한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표제작인 '블러드 차일드'는 지구를 떠나 다른 외계 생명체와 공존하는 미래의 인간을 그린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건 인간이 외계 생명체의 번식을 위한 숙주로 쓰인단 점인데, 외계생명체가 인간에게 숙주를 요구하는 방식과 인간이 그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로맨스물의 그것과 꽤 닮아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버틀러 스스로 이 작품을 노예와 주인의 권력관계로 바라보는 해석에 반해 사랑이야기라고 언급한 바도 있는데, 명확히 말하자면 소설은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듯 보인다.


남자가 알을 낳고 인간이 가축이 되는 세상


특히 거대 곤충을 떠올리는 외계 생명체가 인간 남성의 몸에 알을 낳고 출산하게 하는 것이 일반화된 세상의 모습은 현실세계의 남녀 간 권력관계를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 버틀러의 이 같은 관심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선명하게 이어진다.


지구에 정착한 인간보다 우월한 외계생명체와의 공존을 다룬 '특사'에선 두 종족을 연결하려는 인간과 그를 의심하는 다른 인간들의 대화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독자는 무의식적으로 지구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해온 종의 일부로서 누려온 많은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버틀러의 소설 가운데 독자는 대부분 소수자의 입장에 선다. 당해낼 수 없는 외계 생명체와 그를 추종하는 이들, 시스템이 모두 강자의 입장에 서지만 독자는 그 반대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이기기 어려운 투쟁을 거듭할 뿐이다. 버틀러가 평생에 걸쳐 부딪쳐왔을, 인종과 성별, 권력의 세계는 그녀의 소설 속에서 더욱 공고하고 치밀하게 독자를 억압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늘 최선의 선택을 위해 발버둥친다.


인간은 무엇에든 쉽게 적응한다. 권력과 그 권력이 낳는 차별, 그 차별에 순응하는 무기력에도 인간은 쉽게 적응하고 만다. 버틀러의 소설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은 이러한 무력감을 의식화해 마주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외계 생명체와 인간의 거리는 때로 흑인과 백인, 동양인의 거리감이 되기도 하고 남성과 여성, 성소수자의 거리감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 속 인물들이 내리는 어떠한 결단들은 우리가 오늘 내리는 결정보다 적잖이 훌륭하다. 이쯤 되면 버틀러가 끝내 바라마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은 일처럼 보인다.

             

▲  <블러드 차일드> 책 표지ⓒ 비채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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