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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Sep 27. 2023

<사도>, 떡밥과 함께 사라진 기대감

오마이뉴스 게재, <사도> 영화평

[김성호의 씨네만세 80] 궁금했던 이준익의 복귀작, 왜 실망스러웠나


▲ 사도 포스터 ⓒ (주)쇼박스


드디어 개봉했다. <암살>과 <베테랑>을 잇는 올 여름 또 한 편의 기대작 <사도>가 말이다. 일찌감치 입추가 지난 시점이지만 가을 대신 여름이라 표현한 걸 이해해 달라. 아직 거리에 단풍이 물들지 않았고 극장가엔 열기가 식지 않았으므로.


적어도 사극에 한정해 생각해보면 한국 영화계에 이준익 만한 감독은 흔치 않아 보인다. 그는 2003년 <황산벌>로 사극에 발을 들여놓은 지 2년 만에 <왕의 남자>로 1230만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정점을 찍었고, 2010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과 <평양성>을 거쳐 최신작 <사도>에 이르기까지 이례적이라 할 만큼 사극에 깊은 애정을 보여왔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조까지, 드라마부터 코미디까지를 폭넓게 아우르면서도 사극이라는 틀을 애용해온 그의 취향은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비교할 대상을 찾기가 어렵다.


그럼에 <사도>를 이준익을 빼고 이야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송강호, 유아인, 문근영, 소지섭 등 중량급 스타들이 다수 출연한 것도 이 영화가 주목받은 요소임에 분명하지만 이준익이란 이름은 사극으로서의 <사도>를 특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4년이 넘는 외도의 시간(이 시간 동안 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소원>과 다큐멘터리 한 편을 연출했음은 물론 여러 편의 영화에 배우로서도 출연했다)을 거쳐 다시금 사극으로 돌아온 이준익이 어떤 영화를 찍어냈을지 궁금해 한 이가 오직 나 혼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도 없이 다뤄진 이야기에 쏟아진 기대

  

▲ 사도 갑작스레 등장해 존재감을 과시하고 어느샌가 사라진 정순왕후(서예지 분). 이쯤되면 속편이 나와야 할 듯. ⓒ (주)쇼박스


약간의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사극으로 수도 없이 다뤄진' 사도세자 이야기가 과연 새로울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천하의 송강호와 유아인이 나온다 한들 십중팔구는 상상할 수 있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기가 쉬웠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준익이 사극을 만들지 않았던 지난 3년간 도대체 얼마나 많은 특색 없는 사극이 쏟아졌던가. 상업적으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둔 몇몇 작품이 있었으나 거기까지였다. 하나같이 비슷하고 평범해 미간을 찡그릴 만큼의 불편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무색무취한 영화들. 과연 세월의 심판을 이겨낼 만큼 단단한 영화가 몇 편이나 되었던가. 한국 영화계가 그토록 많은 사극을 만들었으면서도 이렇다 할 감독을 발굴하지 못한 건 단지 운이 없어서가 아닌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등장한 <사도>는 그럼에도 기대를 모을 만한 작품이었다. 이준익의 복귀작이고 <암살>과 <베테랑>을 잇는 성공작이 될 수 있을 듯한 요소도 적지 않았으며 사극 전성시대를 이어가는 또 한 편의 사극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인물의 내면에 깊숙히 들어갔다가 유쾌하게 웃어넘기며 퉁 치고 넘어가는 이준익의 스타일이 사도세자라는 인물을 만나 어떤 결과물을 빚어냈을까 몹시도 궁금했다.


모든 기대를 박살내다, 오직 배우의 연기를 제외하고

  

▲ 사도 영조와 사도세자로 분해 치열한 연기대결을 벌인 두 배우, 송강호와 유아인 ⓒ (주)쇼박스


하지만 뚜껑을 연 영화는 기대만 못했다. 기대가 높았으므로 십중팔구 그리될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준익이라는 이름과 그가 <왕의 남자>에서 이룩한 경지에 크게 못미쳐 실망스럽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왕과 세자의 관계라는 조선조의 역사문제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좁은 틀 안에서만 다룬 선택이 역효과를 낳았다.


충격적인 대하 서사극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영화가 처음부터 왕궁을 배경으로 가족 내 감정적 드라마를 계획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조기교육 문제를 비꼰 블랙코미디였다면 인정할만 하겠지만 후반부 급격하게 정통 사극으로 방향을 틀려했던 움직임은 무엇이란 말인가. 국가와 권력이라는 큰 담론보다 개인의 열등감과 울화 같은 작은 부분에 집중한 건 이해는 되지만 부적절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하기엔 조선이란 배경이 너무도 무겁고 아깝다.


너무 많은 부분을 다루다 미처 회수하지 못한 떡밥이 많았다는 초보적인 문제도 엿보였다. 제법 인상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던 새로운 중전과 노론은 급작스럽게 뒷전으로 밀려버리고 아들을 견제하는 아버지의 테마도 어느순간 급격하게 소멸한다.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를 맞던 내인 문소원은 중반을 지나기 전 조용히 뒷문으로 사라졌고 숨막히는 교육이 빚어낸 광기의 드라마도 부자 간의 엇갈린 이야기로 뒤바뀌어 지루하게 이어질 뿐이다.

  

▲ 사도 인원왕후(김해숙 분)에게 회초리를 맞더니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문소원(박소담 분) ⓒ (주)쇼박스


까놓고 말해 서사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배우들의 역량에 의존할 뿐 엉성하고 틈이 벌어진 전개는 캐릭터에 미처 몰입하지 못한 관객에겐 실망감을 안기기 충분하다. 송강호, 전혜진 등의 연기가 상당부분 보완하고 있긴 하지만 적자가 아닌 영조의 열등감과 어머니의 한을 풀려는 사도세자의 돌출행동 역시 중심서사와 따로 노는 듯 이질감이 느껴진다.


송강호가 연기한 영조와 유아인이 연기한 사도의 명확한 대립구도가 사도세자의 죽음 뒤에 감춰진 사연을 힘 있게 풀어가는 장치로 기능하는 건 사실이다. 부연할 필요 없는 두 배우의 역량이 대단했고 그들의 카리스마가 영화 전체를 지배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찌 배우의 연기만으로 이토록 엉성하게 짜인 얼개가 메워질 수 있겠는가. 하물며 정조의 우스꽝스런 부채춤이 억지 여운을 강요하고 문근영과 진지희의 이질적인 노인분장이 김해숙과 전혜진이 쌓아올린 진지함을 한순간에 허물어뜨렸음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좋았던 건 역시 배우였다. 송강호는 여전했고 유아인은 몰라보게 성숙했으며 김해숙, 전혜진, 문근영 등도 자신의 역량을 충실히 입증해나갔다. 더불어 서예지와 박소담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신예를 발굴한 점도 미덕이라면 미덕일 것이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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