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머니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어. 대법원 제1재판정 정 중앙을 좌악- 가르면서, 엠레 찬이라고 아냐, 그놈처럼 무릎끓고 쫘악- 가르면서, 그 건방졌던 변호사와 몹쓸 검사와 나쁜 의사들과 비웃던 모든 이들을 앞에다 세워두고 끄-떡- 하는 거야. 그런 상상을 해보았던 거야. 그만큼 짜릿했던 거야.
돌아보니 난장이었지. 이나금 어머님은 울고 계셨고. 몇몇 이는 상고 기각이 무얼 뜻하는지 모른 채로 어쩔 줄을 몰라했어. 웃음을 웃는 이와 울듯말듯 하는 이와 이도저도 못하는 이들이 뒤엉켜서 그 차가운 법정을 후끈하게 했어. 그 뒤에서 나는 어시스트에 성공한 미드필더처럼 흐뭇해했던 것이지.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내가 따뜻한 마음이나 온정적 시각이나 동정 그 비스무리한 걸로 움직이는 놈은 아니잖아. 세상에는 나 같은 놈도 들끓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고. 이 사람이 이겼으면 좋겠다, 이 싸움은 이겼으면 좋겠다, 꼭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순간들을 만난다는 말이지. 원직이며 공명이 현덕을 만났을 때도, 충무공이 수군은 못없앤다 명량에서 싸워보자 했을 때도, 죽어버린 옛 정치인들을 보았던 때도, 꼭 그랬을 거야. 남들은 좀처럼 가지 않는 좁은 길로 뚜벅뚜벅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지. 거기에 꺾이지 않는 의기며 재기까지 있다면 사나이가 반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어?
나는 나를 무척 아끼는 사람이라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진 않았어. 1심 재판부터 찾았던 수많은 시민들과 오늘에야 겨우 인사를 나눴을 정도라고. 라포가 생겼다니, 마음이 한 쪽에 서 있다니, 중립을 지키라니, 이런저런 얘기들이 신물나게 싫었는데 그들 입장에선 그렇게 봤을 수도 있겠다 싶어. 깊이 응원한 건 사실이니 억울하지도 않아. 매 순간 모든 가능성을 의심하면서도 응원하는 마음을 치워버릴 수는 없었던 거지.
그러나 나는 여적 그게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해. 내 저널리즘은 응원하는 마음을 치워버리는 게 아니었거든.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들이 나의 가장 못한 점이라니 어쩌겠어, 나라도 나를 아껴야지. 아무래도 기자로서는 여기까지인가봐.
거 왜 <7인의 사무라이>라고 있어. 그 엔딩에서 사무라이들은 태반이 뒤지고 농민들은 노래를 불러. 동료들의 무덤 앞에 앉아 농민들을 내려다보던 리더에게 한 놈이 물어. 이겼는데 왜 꿀꿀해하냐고. 리더가 답해. 이긴 건 우리가 아니라고. 저 농민들이 승자라고. 우리는 또 살아남았을 뿐이라고. 이번에도 진 싸움이었다고. 문득 그 장면이 생각났어.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았어.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다음 싸움이 있겠지. 그때는 정말 이길 수도 있겠지.
나란 놈은 영화에서도 바다에서도 언론에서도 졌네. 에이 뭐, 누가 됐든 골은 넣었다 아이가! 그럼 된 거지. 끄-떡!
2023. 1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