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절대 쓰지 않을 주제

시작 끝 다시 시작

by 마나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에 김영하 작가가 나온 영상을 보았다. 작가가 쓴 <<살인자의 기억법>>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 관심이 갔다. 책은 소재가 독특했고 감정을 배제한 느낌의 문체는 글의 내용과 잘 어울렸었다. 유재석이 나의 호기심을 시원하게 긁어주려는 듯 주제 선정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다. 김영하 작가는 '절대 쓰지 않을 주제'를 적어놓은 공책이 있다고 했다. 꼭 글로 써야 할 것 같은 주제는 현실적인 생각으로 이어져 스스로 한계를 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쓰지 않을 것 같은 주제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막 쓸 수가 있다는 것이다. 가끔 글 소재를 찾다가 그 노트를 다시 살펴본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라 적은 소설이 <<살인자의 기억법>>이었다.


자기가 만든 틀에 스스로 갇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작가만의 방법이었다. 깊은 연륜이 느껴졌다. 말랑말랑한 사고의 유연성이 기분 좋게 부러웠다. 내가 쓰는 글은 어느 정도의 틀 속에 있는 걸까. 절대 쓰지 않을 주제. 작가의 질문을 내 글쓰기의 중간 점검 단계에 사용해보기로 했다. 올해를 마무리하기에 꽤 괜찮은 질문이었다. 내 생각이 섞일수록 김영하 작가의 본래 질문 의도가 약간씩 변해갔지만 나쁘지 않았다. 올해 내가 절대 쓰지 않았던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질문을 만들어 놓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부분과 표현해선 안 된다고 정한 경계선이 보였다. 선 안과 선 너머도 생각했다. 결국 김영하 작가의 질문은 내게 들어와 스스로 정한 글쓰기의 경계가 적절한 것이었는지를 점검하는 질문이 되었다.


나는 요즘 자유학교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도 교사로서도 미흡한 부분이 많은 나는 그래도 비틀거리며 한 손자국씩 손에 힘을 주고 글을 쓴다. 자유학교에 있는 시간을 혼자 느끼기 아까워서다. 좋은 만큼 흘러가버리고 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생겨났다. 마음속 답답함이 모여 길을 찾기 시작했고 그러다 우연히 글을 적기 시작했다. 큰 재주 없이 열심히만 쓴 글이 하나씩 모이자 내 마음도 조금씩 단단해졌다. 그리고 주제넘지만 자유학교 사관이 되어보기로 했다. 교사긴 하지만 학생과 같이 모든 활동에 참여하므로 나의 학교생활을 이야기하면 자연스럽게 자유학교가 학교 밖 사람들에게도 보일 거라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 '고등학생'의 삶을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충분히 표현할 수도 있어 내 사심도 채워지고 일석이조였다.


하지만 사관은 공식적으로 부여받은 직책이 아니었다. 스스로 정한 역할이므로 내 글은 나를 벗어나면 안 되었다. 글에 학생과 동료 교사의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었다. 좀 적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 적었던 글은 자기 검열을 거쳐 다 삭제되었다. 남의 이야기를 허락받지 않고 쓴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선 밖의 일이었다. 나는 자유학교의 일부일 뿐이므로 결국 내 글도 한 조각일 뿐이었다. 내 시선에 한계가 고스란히 느껴지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최대한 학생으로서의 나를 적고 있었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교사의 모습이 오지랖처럼 글 속에 들어가기도 했다. 쓴 글이 늘어나고 있긴 했지만 내 글로 자유학교의 본래 모습을 다 보여줄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답답했지만 내가 진짜 고등학생이 아니라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 시각으로 자유학교를 모두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자유학교가 다가 아니라는 뜻이다. 한계를 안다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가야 할 방향을 알게 해 준다는 면에서는 유익하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으니 내가 이곳에 좀 더 있어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할 수 있는 한 머물러서 보고 듣고 느끼며 기록해야겠다고 다짐도 했다. 그리 똑똑한 사관은 아닌지라 학교를 관찰해서 기록하기까지 시간이 남들보다 두 배 더 걸린다. 그래도 스스로 부여한 교사로서의 내 몫을 다하고 싶다. 있고 싶은 곳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 생각한다. 내게 온 행운에 보답하는 의미라고 봐도 좋다. 내가 자유학교를 떠나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내가 쓴 기록들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10일 후에 있을 5기 수료식 이름은 '배 째라!'이다. 올해 1년간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내년에 제대로 한번 시작해보려는 용기를 이름에 담았다. 나도 학생 따라 올해 절대 쓸 수 없었던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며 한 마디 해본다. "그래, 학교 밖 사람들도 궁금하면 학교 보러 직접 오겠지. 담을 수 있을 만큼은 담아볼 테니 나머지는 배 째라!" 마침 이름도 자유학교이니 학생의 자유만큼 사관의 자유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모든 것을 적어야 한다는 부담을 좀 덜고 조금 비겁하게 쓸 수 있는 것만 쓰고 살 나를 기대한다. 오늘도 학교에 출근했다. 적고 싶은 글감들 속에 적을 수 있는 글감이 보인다. 책상과 걸상 그리고 책밖에 없는 교실 두 칸짜리 작은 학교에서 오늘도 나는 작은 기적을 찾는다. 학년 말이라 너무 바쁘다. 바쁜 와중에도 웃을 수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