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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Jan 09. 2025

갈팡질팡

  언니야, 익숙한 걸 버리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아.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언니는 "7년을 한 곳에서 지냈는데 당연하지."라고 웃으며 말하겠지. 꿈에서만 그리던 1년 휴직이었는데 막상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익숙한 것들이 떠나는 발목을 잡아. 제일 처음 걸리는 게 집이었어. 유급 휴직은 해야 할 일을 주니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지만 지금 집은 계속 쓸 수 있고, 무급 휴직은 자유롭겠지만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은 버려야 하니까 말이야.   

   

  어떤 선택이든 제약은 있겠지.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아서 고민 중이지만 지금 마음 같아서는 덜 쓰고 자유로워지고 싶다. 떠날 준비를 시작하니 여태 내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살고 있었는지 바로 알겠더라. 몸에 붙이고 살고 있던 것들 하나씩 떼어내는 게 떠날 준비가 아닐까 싶다. 시간이 지나 진짜 결정해야 할 때가 오면 현실적인 면을 생각해서 덜 버리는 결정을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쉴 결심을 했는데도 내 마음은 여러 가지 문제로 여전히 갈팡질팡하다. 나는 언제쯤 돈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을까.      


  딱 하루만 쉬고 싶다, 아니, 딱 한 달만. 이런 마음이 쌓이면서 쉬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었어. 휴직을 입 밖으로 꺼내기 전에는 감히 생각도 못 했는데 막상 한 번 꺼내고 나니 두 번 말하는 건 쉽더라고. 내가 처음 말했을 때 군말 없이 그대로 하라고 말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아무 대책 없는 거 알면서도 묻지 않아 줘서 고마워. 덕분에 크게 부담 없이 천천히 쉴 계획을 짤 수 있었어. 아직 휴직을 결정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남았어. 나는 올해 어떻게 살게 될까.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냥 지금은 쉴 수 있다는 사실이 달콤하지만 막연한 꿈처럼 멀게만 느껴질 뿐이야.     


  휴직을 준비하며 내가 지키고 싶은 규칙 하나는 주변 도움 없이 오직 내 힘으로만 쉬는 거야. 오랫동안 일하며 느낀 건 힘든 만큼 자립의 묘미가 있다는 거였어. 독립적으로 내 삶을 꾸려왔다는 자부심은 쉴 때도 버리면 안 될 것 같아. 그래서 쉬면서도 홀로 서 있는 기쁨은 계속 느껴보려고. 멀쩡한 직장 놔두고 왜 사서 고생이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한 대답은 나도 1년 쉬어봐야 알 듯해. 올해 나 진짜 열정적으로 쉴 거야. 모르겠다는 답을 해서 미안하지만 무책임한 의미는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줘.     


  휴직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어. 내가 1년을 놀아도 괜찮을 만큼 필요한 돈은 얼마일까. 처음 해보는 고민이었어. 매달 돈이 들어오는 월급쟁이는 '이번 달 좀 많이 썼네. 다음 달 적게 써야지' 정도만 생각하지 총액을 따지며 살진 않잖아. 어렴풋이 생각해 봐도 1년 치 내 목숨값은 만만치 않았어. 다행히 돈을 많이 쓰지 않을 자신은 있으니 내가 짜낸 전략은 적게 쓸 요량으로 그만큼 적게 모으는 것이었어. 지금도 열심히 모으고 있으니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살다가 모자라면 오랜만에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며칠 전에는 날씨가 추워지는만큼 게을러지더니 그냥 익숙한 대로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유난히 이불 속이 따뜻해서 곧 해야 할 이사가 성가시게 느껴졌던 것 같아. 축 늘어진 나를 보고 있자니 오랫동안 고민하고 결정한 것도 쉽게 포기하려는 듯해 스스로 좀 실망스럽더라. 곧장 부끄러워져서 다행이었지 조금만 시간을 더 끌었다면 그냥 주저앉았을지도 몰라. 쉬는 것도 힘이 필요한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봐.


  생각이 꼬일 땐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야. 새벽이긴 했지만, 주말인데 아무렴 어때. 당장 묵혀 있던 오래된 짐들을 다 꺼냈어. 그리고 이사 갈 때 들고 가지 않을 것 같은 물건은 따로 모았어. 주변에 나눠줄 것, 버릴 것을 나누고 나니 싱크대 서랍장이 텅 비더라. 한 공간을 다 비워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것을, 내 욕심에 다 쌓아놓고 산 거지 싶었어. 욕심을 버리고 나니 속이 시원했어. 그리고 몸에 묻어 있던 먼지가 털린 듯 가벼웠어.  

   

  다음 날에는 책장을 정리했어. 다시 볼 책, 보지 않을 책, 팔 책, 버릴 책을 분류를 했지. 책 욕심은 쉽게 버려지지 않아서 정리가 끝난 뒤에도 책장에는 군더더기가 있더라. 특히 법정 스님 책<무소유>는 잡고 한참을 꼼지락거렸어. 필사한 책이라서 필사 공책만 있으면 됐거든. 버려도 되는데 버리지 못했어. <무소유>를 소유하고 싶은 욕심은 버릴 마음인지 아닌지 혼자서 한참 고민했어. 스님들은 청소로 수양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런 욕심을 버리기 위함이 아닐까 싶어. 나도 언젠가는 책을 버릴 수 있겠지? 


  아무래도 책장은 날 잡아서 한 번 더 손을 봐야 할 것 같아. 그래도 큰 부분을 정리하고 나니 나머지는 조금 더 쉬웠어. 물건을 정리하면서 이사에 대한 부담도 서서히 줄더라. 그만큼 떠날 발걸음도 가벼워졌다는 뜻일 거야. 이제 이사를 하든 안 하든 가볍게 움직일 수 있어서 좋아. 꼭 필요한 물건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없애는 작업도 내 평생 처음인 것 같다. 법정 스님을 좇아가는 중이라고 혼자 착각하며 청소했어. 착각이라도 좋았어. 


  미래는 알 수가 없어서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아프잖아. 그런데 청소를 하니 미래를 대비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정리가 됐어. 이 말을 들으면 언니는 아마도 어이없어하며 진작 깨달았으면 학창 시절에 엄마한테 꿀밤 10대는 덜 맞았을 거라고 잔소리를 하겠지. 그럼 나는 또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어디냐며 되레 큰소리칠 거야. 아무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가볍게 몸을 만들어서 쉬이 떠날 수 있게 준비해 놓는 거야. 언니야, 나 잘하고 있는 것 같지?     


  버리고, 정리하고 나눠주면서 내게 오롯이 남을 물건을 생각해 봐. 이전보다는 많이 줄긴 했지만, 아직 한참 멀었어. 나 스스로 옮길 수 있을 정도만 남겨야 해서 더 줄일 수 있는 구석을 찾아야 해. 그래야 내 힘으로 떠날 수 있을 테니까. 귀하게 찾아온 1년을 일할 때와 같은 일상으로 보내고 싶진 않아. 내 능력에 맞게, 있는 돈에 맞춰 최대한 현실감 떨어지는 삶을 사는 게 내 목표야. 일하면서는 현실적으로, 효율성 있게 일해야 했으니 반대로도 살아봐야지.      


  생각도 안 해 봤던 방식으로 살아보려니 아직 구체적인 것까진 잡히진 않는다. 다른 사람들 말처럼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게 직장을 쉬면서까지 할 일인가 싶어 자기 검열도 수시로 하고. 처음 본격적으로 쉬겠다고 마음먹으면서 책상에 앉아 곰곰이 내가 온전히 나로 살았던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해 봤어. 취업 준비부터 오래 걸렸으니 먹고살 걱정 없이 살았던 건 딱 고등학교 때까지더라고. 그때도 물론 입시로 바쁘긴 했지만 비빌 언덕은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나는 나를 사회에 맞는 모양으로 만들어 살았던 것 같아. 열심히 살았고 앞으로 일할 시간이 더 남았으니 1년 정도는 잠시 접혔던 허리 펴고 온전히 나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언니야, 나 조금 신나 하는 거 느껴져? 가진 게 없을수록 뺏길까 봐 두려워할 일이 줄어들어서 그런가 봐. 아직 마무리해야 할 일도 있고 쉴 계획도 세워야 하지만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듯한 지금이 재미있어. 청소가 끝나고 나면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어디에서 머물지 계획을 잡을 수 있을 거야. 그땐 또 그때대로 살맛이 나겠지. 내가 내 길을 잘 찾을 수 있게 지켜봐 줘. 혼자 길을 가겠지만 마음만은 늘 언니랑 같이 있을 테니까. 나는 어디서든 배우고 느끼며 살 거야.  

    

오늘의 나의 설렘이 언니에게도 잘 전달되길 바라며 철없는 동생이.


대문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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