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삿포로 한달살기 : 첫날
비행기가 신치토세 공항 바닥에 닿았어. 철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속도가 온몸에 전해졌지. 덩달아 앞으로 쏠리는 몸을 추스르며 창밖을 봤어. 내가 진짜 왔네. 가까워지는 공항 건물을 보고 있자니 일본에 온 실감이 났어. 몇 번 와 보긴 했지만 혼자서는 처음이라 비행시간 내내 잤던 사람이 내가 아닌 것처럼 갑자기 긴장이 되더라고. 혼자라는 생각은 여유가 없을 땐 생존본능으로 발현이 되는 것 같아. 주책없이 숙소를 찾지 못해 어두운 밤에 홀로 길거리를 방황하는 장면이 계속 떠올랐으니까 말이야.
가는 길은 미리 알아놨었어. 공항버스와 지하철 그리고 다시 시내버스를 타야 했지. 제일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비행기 도착 시간이 늦은 오후라는 거였어. 나는 낯선 곳에서 어두워지면 남들보다 무섬증을 더 많이 느끼곤 했거든. '그래도 뭐 어때.'라는 말을 속으로 연신 뱉어냈어. 폰에 번역기도 깔았고 구글 지도도 있잖아. 어젯밤에 후기도 다 찾아봤고 말이야. 내가 아무리 길을 못 찾아도 이렇게까지 준비했으면 된 거야. 확신이 필요했던 나는 남들도 다 하니 나도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 또 했어. 해가 지는 시간까지는 2시간 반 정도가 남아 있었어. 계획대로만 하면 무사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자 싶었지.
비행기는 주차를 하기 위해 활주로에서 한참을 더 어슬렁거렸어. 그동안 나는 폰 유심을 교체하고 있었고. 짐도 위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폰만 현지 유심과 연결이 되면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갈 수 있을 듯했어. 효율적으로 시간을 잘 쓰고 있는 내가 대견해 자동으로 어깨가 으쓱거려졌지. 첫 시작이 여유가 있어 다행이었어. 교체를 하고 데이터가 켜지길 기다리고 있는데 비행기 주차가 끝났어. 문이 열리고 곧장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가기 시작했지. 나도 짐을 챙겨 따라 나왔어. 폰이 새 유심을 인식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네 싶었지만 걸어야 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어. 눈앞에 신치토세 공항에서 유명한 큰 도라에몽이 보였어.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지.
공항은 예전에 본 모습 그대로였어. 나는 경보하듯 버스정류장을 찾아 열심히 걸었어. 틈틈이 확인한 폰은 여전히 잠잠했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작동하지 않는 유심에 당황했지만 다행히 버스정류장은 폰 없이도 찾을 만하더라고. 저렴한 유심이라 늦는 건가. 현지에서 교체한 유심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후기를 몇 번 본 적 있어서 내 것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들기 시작했던 것 같아. 버스는 거의 만원이었어. 나는 폰 게임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고등학생 옆에 앉았지. 딱딱하게 굳은 나와는 반대의 모습이었어. 나도 옆사람과 심박수를 맞추기 위해 크게 한숨을 쉬었어. 잠잠한 유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폰은 계속 만지작거렸지만 말이야. 다행히 버스는 잘 가고 있었어. 그 뒤에도 숙소로 향하는 지하철과 시내버스로 환승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 폰 빼고는 모든 게 계획에 맞게 잘 움직이고 있었어.
문제는 버스정류장에서 1분 거리에 있는 숙소를 찾는 거였어. 데이터를 사용할 수 없는 내 폰으로는 저장한 집 주소만 볼 수 있었는데 건물에 주소가 적혀 있는 건 아니라서 쓸모가 없더라고. 어젯밤에 구글로 본 회색 외관 건물을 떠올리며 숙소를 찾았어. 해가 지고 있어서 조금씩 조바심이 들었던 것 같아. 거의 다 왔으니 어두워지는 걸 크게 신경 쓰지 말자고 애를 써봤지만 쉽진 않았어. 더군다나 회색 건물이 주변에 생각보다 많았어. 결국 헷갈리며 헤매기 시작했지. 버스 정류장에서 가깝다고 했는데 집을 찾아다니면 다닐수록 나는 점점 더 멀어지는 느낌이었어.
설상가상으로 그때 갑자기 폰 배터리가 나갔어. 집 주소를 외우고 있던 게 아니라서 더 당황스러웠지. 점점 어두워졌고 그에 따라 무섬증도 커졌어. 나는 다급하게 차고에서 일하고 계신 분께 배터리 충전을 할 수 있는지 여쭤봤는데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분이셨어. 그래도 근처에 다른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분과 이야기를 해야 했지. "세븐 일레븐! 로손! 패밀리 마트!" 나는 이름을 종류별로 나열하며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를 여쭈었어. 다행히 세븐 일레븐 이름을 알아들으시더라고. 10분 걸으면 편의점이 있다고 하셨어. 살았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바로 직진을 했어. 1분 거리에 있는 숙소가 멀리 있는 후지산과 똑같이 느껴졌어.
편의점에 도착해서 배터리 충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를 여쭈었어. 처음엔 점원이 방법이 없다 하셨어. 나는 속으로 방법이 없다면 여기서 밤을 새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점원과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했어. 그 와중에도 당황한 나를 내팽개치지 않고 함께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해 주셔서 말할 수 없이 감사하더라고. 그때 다른 점원이 내 사정을 알아채시고 보조 배터리를 빌려주셨어. 그리고 조금 뒤 폰을 켜고 숙소 주소를 찾아냈지. 우리 셋은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보며 숙소 위치를 알아냈어. 그 순간, 제일 먼저 드는 감정은 편의점에서 자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었던 것 같아. 점원은 마침 퇴근 시간이라며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주신다고 하셨어. 나는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몰라 고장 난 기계처럼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만을 반복해서 외쳤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지.
나는 한국인이고 그는 일본인이었어. 영어는 우리 둘 사이에 도움이 되지 못했어.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어. 그래서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목소리로, 얼굴 표정으로 그리고 눈빛으로 고맙다는 말을 계속했어. 진짜 고마웠으니까. 점원도 못 알아듣는 내 한국말을 정성을 다해 들어주셨어.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겠다는 듯 웃어주셨지. 나이도 나보다 많이 어려 보였는데 나는 어둠에 눈이 멀어 체면 불구하고 완전히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어. 숙소 앞에 도착했을 때는 새까만 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었어. 평소에 제일 좋아하는 달이었는데 정신없이 헤매다 보니 별도 달도 보지 못했던 거지. 점원에게 웃으며 수십 번 말한 아리가도 고자이마스를 마지막으로 다시 했어. 그도 웃으며 뒤돌아섰지. 언젠가는 내 뒷모습도 저렇게 정겹게 보일 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방에 오자마자 미안한 마음에 편의점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산 샌드위치를 뜯었어. 그리고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입에 마구 구겨 넣었지. 멍한 눈에 작은 유심이 들어왔어. 저렴한 유심은 현지에서 작동 안 할 수 있다는 말을 분명히 들었는데 당장 눈앞에 적힌 저렴한 가격에 눈이 멀어 널 선택해서 이 사달이 났구나 싶었어. 만 원 아끼려다 십만 원 쓰게 된 꼴이었지. 난리를 치며 찾은 숙소는 상대적으로 너무 조용했어. 나는 금세 무음에 이끌려 침대 밑으로 꺼지고 있었어. 폰이 꺼진 일본은 내게 어둠 그 자체였던 것 같아. 쏟아지는 졸음 사이로 내일 또 새 유심을 찾아 손짓 발짓을 해야 한다는 게 너무 멀게만 느껴졌으니까. 아, 몰라. 그러다 곧 잠이 들었어. 일단 숙소에는 도착했으니까 된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