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할 땐 튀김소바

일본 한달살이 : 음식 주문

by 마나

휴직 후 살이 쪘어.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먹고 돌아서면 또 입맛이 돌더라고. 몸은 한 번 찌는 쪽으로 방향을 틀면 앞만 보고 달리는 것 같아. 덕분에 갈수록 입은 가볍고 몸은 무거워졌지.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을 정도가 됐을 때 일본 삿포로에서 한달살이를 시작했어. 잘 됐다 생각했어. 해외에 있으면 긴장되는 만큼 에너지 소모도 클 테니까. 집 나오면 개고생인 걸 다이어트 비법으로 써보자 싶었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식욕에서 무임하차하듯 일본에 찐 살을 다 던지고 올 계획이었어.


처음 며칠은 다이어트와는 상관없이 식당에 들어가지 못했어. 일본어를 할 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위축이 됐거든. 밖에서 보면 정확히 가게가 무엇을 파는지 알기도 어렵고 간판 사진을 찍어 번역기를 돌려도 일본어 실력이 나와 큰 차이가 없는 AI번역기는 의지처가 되지 못하더라고. 그래서 혼자 식당 주변을 돌며 둥둥 떠다니다 돌아오곤 했어. 아침과 저녁은 간단하게 숙소에서 먹고 점심은 식당에서 맛있게 먹으려 했는데 본의 아니게 삼 시 세끼를 편의점 음식으로 먹었지. 다행히 마트는 숙소 근처에 있었어. 한동안 식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한을 그곳에서 다 풀었던 것 같아. 샌드위치를 비롯해서 초밥, 우유, 사과, 요거트, 아몬드, 낫토, 당근, 바나나 등 아침저녁으로 먹을 것을 가방 가득 샀거든. 굶어 죽진 않겠다 싶었어.


시간이 지나며 일본이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어. 그만큼 맛있는 걸 먹고 싶은 식욕도 다시 꿈틀거렸지. 오늘 아침엔 용기 내어 식당에 들어가 보자고 마음먹었어. 근데 인터넷에서 찾은 '일본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은 생각보다 기름진 게 많은 거야. 튀김, 징기스칸(양고기 구워 먹기), 라멘, 수프카레까지 모두 경계해야 할 것들이었지. 나는 아직 덜 빠진 뱃살을 부여잡으며 기름 빠진 다른 음식들을 찾았어. 다행히 숙소 근처에 평이 좋은 메밀 소바집이 있더라고. 면에 메밀이 들어가는 정도까지 선택할 수 있는 곳이라 했어. 메밀을 많이 넣어달라고 해야지. 번역기에 대고 할 말까지 미리 생각해 놓고 만반의 준비를 끝낸 후 식당으로 출발했어. 분명 며칠 동안 편의점 음식도 배부르게 먹었는데 마치 그동안 굶었던 것처럼 허기가 졌어.


조용히 소바 가게에 들어갔어.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손님이 아무도 없더라고. 나는 벽에 걸려 있는 일본어 메뉴판을 그림 보듯 감상하며 속으로는 영어 메뉴판을 기대했지. 주인은 내가 당연히 일본인이라 생각하고 일본어로 말을 건네셨어. "English Menu, please" 내 말을 듣고 주인은 나와 똑같은 눈빛을 보냈어. 며칠 삿포로에서 지내며 공통으로 사용할 언어가 없는 사이에서 매번 주고받았던 바로 그 눈빛이었지. 나는 번역기를 켜고 영어 메뉴판을 요청했어. 그런데 나랑 친하지 않은 번역기가 내 목소리를 다르게 인식하는 거야. 주인과 나 사이에 정적이 흘렀어. 번역기에 소리 말고 바로 글자를 쳤으면 됐을 텐데 그땐 당황해서 처음 생각한 방법 외엔 다른 방법을 찾을 여유가 없었어.

일본소바메뉴판.jpg 소바집 메뉴판

얼마나 용기 내어 들어온 식당인데 그렇다고 그냥 나갈 순 없었어. 손님이 나뿐이라 주인이 바쁘지 않은 상황인 건 다행이었지. 나는 손짓과 표정으로 야무지게 소바를 먹을 의지를 표시했어. 주인은 열심히 내 표정을 읽은 후 잠시 고민하다가 손으로 메뉴 하나를 짚으시더라고. 그게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어. 소바집이니 소바겠지 했어. 주문을 끝내고 나서야 약간 쌀쌀한 삿포로 날씨에도 불구하고 내 등에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어. 나는 찬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셨지. 멀리서 내 물잔이 비어 있는 것을 본 주인은 바로 다시 채워주셨어. 멋쩍게 웃는 나를 보며 주인도 같이 웃더라. 애썼다는 의미 같았어.


주문이 끝났다고 아직 마음을 놓을 단계는 아니었어. 부엌에서 뭔가를 튀기는 소리가 들렸거든. 손님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고 계신 게 틀림없었는데 튀기는 소리가 심상찮더라고. 내가 시킨 게 소바가 아니었나. 알 수 없었지만 다시 물을 수도 없고 물을 필요도 없었어. 나오는 대로 먹는 것 외엔 더는 선택권이 없었으니까. 조금 있으니 내가 시킨(?) 음식이 나왔어. 소바 위에 한가득 있는 튀김이 돋보였지. 주인은 내어 온 튀김소바가 맛있을 거라는 의미로 자신 있게 그릇을 놓으셨어. 보자마자 입에선 침이, 머리에선 뱃살이 떠오르더라. 순간 갈등을 하긴 했지만 나는 미련 없이 이성의 끈을 놓았어. 그리고 다이어트에는 튀김소바가 최고라는 비합리적 신념을 머릿속에 억지로 넣으며 다급하게 젓가락을 들었지.


소바는 딱 내가 원하는 맛이었어. 신발도 튀기면 맛있는 법이니 튀김 맛은 말할 것도 없었고. 나름 음식에 철학이 있는 집이란 생각이 들었어. 정성이 느껴졌거든. 그래서 나도 정성을 다해 먹었어. 제법 많은 양이었는데 남기지도 않고 말이야. 대신, 다이어트의 마지막 보루로 최대한 천천히 먹었지. 배가 찰수록 마음의 여유도 생기는 것 같았어. 음식값을 지불하며 주인에게 겸연쩍게 "오이시!(맛있었어요!)"라고 했어. "괌솨합니다."라는 귀여운 한국말이 돌아왔지. 식당을 나오는데 서툴지만 잘 있다 나온 것 같았어.


식당 문을 한 번 열어봤으니 이제는 더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 일본도 곧 편안해지지 않을까. 동그래진 배를 쓰다듬으며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다독였어. 일본에 적응을 하면 할수록 볼록한 배도, 불안한 마음도 분명히 가라앉을 거라고 확신을 주면서 말이야. 일본 사람들 특유의 소박함이 좋아. 그들의 삶이 오늘 먹은 소바처럼 담백하고 고소해 보이거든. 그 맛을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았겠어. 나는 그 시간을 존중해주고 싶어. 앞으로 일본에서의 한달살이를 더 정성스럽게 하면서 말이야. 그럼 덩달아 내 몸과 마음도 군더더기 없이 담백해지겠지?

일본소바.jpg 튀김 가득 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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