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너무 신나는 일이 있었다. 나, 귀인을 만났다.
귀인이 나를 때렸다. 말로. 쉴 새 없이. 나는 얻어맞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맞는 말이란 건 중의적인 의미다. 맞는 말로 나는 얻어맞았다.
내가 제일 뼈 아프게 들었던 말은 내가 회피형이라는 말이었다. 정말 이상하지. 이미 나는 내가 회피형인 걸 알고 있다. 근데 그 순간은 세상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니까 이런 느낌이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회피형입니다. 뭐라고요? 방금 저를 회피형이라고 부르신 건가요? 제 이름이 회피형인 걸 어떻게 알고 그렇게 부르셨나요...?
나는 바보였고 그래서 이젠 더 이상 아무것도 회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마침 두 달 전 내가 언팔로우했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길래 이것이 기회로구나 싶었다. 원래의 나 같았으면 이 연락을 무시하거나 내가 받았던 만큼의 상처를 돌려주곤 후회했겠지. 그리고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며 차단했을 거야. 하지만 나는 달라지고 싶었다.
끝낼 땐 끝내더라도 도망치지 말고 직면하는 대화를 해본 다음에 끝내자는 결심이 섰다. 아주 고요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친구와 통화를 시작했고, 참나, 나는 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엉엉 울고 있었다. 나는 고요한 게 뭔지 잘 모르나 보다. 정숙도... 사실 정수기 밖에 난 몰라. 아 목마르고요. 그래서 정숙이가 뭐라고요? ㅋㅎ
나 너한테 그때 이런 상처받았다고.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나는 너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리고 그렇게 행동하려고 했었다는 말을 하면서 친구의 눈치를 살폈는데, 친구는 따라 울기는커녕 조금 황당해하는 것 같았다. "말을 하지!" ... 그러게. 왜 난 말을 안 했지. 아니이 말을 하면 너랑 싸울 것 같고... "너한테 상처 준 부분, 변명할 말도 없이 너무 미안해. 하지만 나는 그게 우리 관계를 끝낼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 그러네. 맞는 것 같기도 해. "우리가 그동안 나눠온 시간과 마음들이 있잖아. 너는 그걸 잊었어? 우리만 아는 그 기억들이 있잖아. 그걸 어떻게 이렇게 쉽게 끊어. 안 끊어지는 건데 그건." ...어? 나는 감동받았다. 아니... 우리 그동안 바빠서 서로 연락도 잘 못 하고... 서로의 근황도 모르고... 나는 좀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멀어졌어?" ... 아니 아니. 내 마음은 그대론데... 난 네가 멀어진 줄 알고. "너 마음이 그대론데 왜 내 마음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 그러게. "말을 해주면 안 돼? 애정을 확인하고 싶으면 확인하고 싶다고 말을 하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을 하고. 상처받으면 상처받았다고 말을 해주면 되잖아. 나는 네가 아무리 못나고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여줘도 으 싫다 안 해. 고재연은 원래 저런 모양이지 하지." ...응... "나는 친구 사이에서 절대 자존심 안 부려. 절대." ... 정말 좋은 말이다. 그거.
'나는 친구 사이에서 절대 자존심 안 부려'
이미 1차로 얻어맞아서 전치 12주 정도인 상태인 나에게 두 번째 주먹질이 날아온 셈이다. 덕분에 나는 전치 24주가 되었다. 귀인이다. 이 친구도 귀인이구나. 알고 있었는데 새롭게 느껴졌다. 나를 상처 준, 그래서 차단한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동안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젠 너무 선명하게 기억나는 게 신기했다. 내가 회피하지 않았다면, 내가 자존심 부리지 않았다면 달라질 수도 있었을 사람들.
나는 이제 회피하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존심도 안 부리기로 결심했다.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나 자존심 안 부리고 말하는 건데! 나 너 좋아한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상처받으면 상처받았다고 솔직하게 말할 거야. 차단 안 하고! 알겠지! 음하하하하핳! 난 달라지는 거야! 어른이 되는 거야!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친구들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일단 모두가 대답의 시작을 '엥?'으로 했다. 엥이라뇨. 엥 말고 오 라고 해야지. 친구들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공통된 의견들을 조합하자면 아래와 같다.
"네가 나 좋아죽겠어 하는 건 이미 알고 있어. 알겠지만 나도 널 좋아한다. 너 꽁하면 언팔하거나 차단하는 습관도 알고 있어. 미안한데 별생각 없어. 나한테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만약 그런다 쳐도 내가 카톡 하나만 먼저 하면 넌 바로 스르르 풀릴 거잖아."
... 난 놀랐다. 친구들이 나보다 더 나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잠깐만... 맞는 말이잖아. 나는 화가 나서 차단해도 전화까진 차단 안 한다. 왜냐면... 전화 오면 받아야 하거든. 나는 사실 전화가 오길 기다린다. 나는 나를 아무리 할퀴어도 다시 약 발라주면 바로 사르르 녹는다. 역시 날 좋아했군 하면서. 나는 알고 있던 것을 또다시 새롭게 들으면서 내 주변에 이렇게나 귀인이 많았다니 놀라워했다.
동시에 조금 울적해졌다. 나 정말 미숙한 사람이잖아. 삐졌다고 티를 내고, 내가 삐져있으니까 네가 먼저 연락하라고 팽 돌아서있는 그런 사람이라는 거잖아, 내가. 난 그런 사람을 정말 싫어했는데. 그게 나라니. 이런 나라도 괜찮겠니? 또다시 친구들은 어이없어했다.
"네가 그런 사람인 걸 알고 친구가 된 거 아니겠니. 그리고 그런 게 나한텐 귀엽게 느껴지니까."
오... 오... 오...
오...
대요니눈... 귀요워욘.... 뿌.
나의 못나고 미숙한 지점들을 반드시 고쳐서 다시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걸 고치지 않아도 날 사랑하는 귀인들이 있다는 점에 나는 크게 안심했다. 정말 오랜만에 나는 내가 행운아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