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방관의 무게: 침묵을 깨고 '함께'의 문장을

사과라는 문장, 그 너머의 진실

by 자신을사랑하기

제39화. 방관의 무게: 침묵을 깨고 '함께'의 문장을 쓰는 법

학교폭력이라는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 갈등의 당사자들이 사과와 용서의 지난한 과정을 겪는 동안 그들을 둘러싼 거대한 동심원이 있습니다. 바로 '목격자'들입니다. 교실 전체를 짓누르는 가장 무거운 것은 가해자의 폭언이나 피해자의 눈물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 만들어낸 **‘침묵의 무게’**입니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를 '중립'이라 칭하며 한발 물러서지만, 사실 회복의 완성은 당사자들의 손이 아닌, 그들을 지켜보는 공동체의 시선 끝에서 결정됩니다.


01. 중립이라는 이름의 무책임: 기울어진 운동장의 법칙

사건이 터지면 주변인들은 본능적으로 방어 기제를 작동시킵니다.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지"라며 거리를 둡니다. 하지만 폭력의 맥락에서 물리적 혹은 심리적 중립은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에드먼드 버크의 말처럼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선한 이들의 방관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 힘의 우위에 있는 쪽을 지지하는 꼴이 됩니다. 침묵은 가해자에게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승인'과 '동조'의 메시지가 되고, 피해자에게는 세상 전체로부터 거절당했다는 '고립'의 신호가 됩니다. 우리가 내뱉지 않은 말들이 쌓여 '방관의 무게'가 될 때, 피해자의 회복은 한층 더 멀어집니다.


02. 진실의 대가: 행정적 전략이 된 보복성 신고

하지만 방관의 벽을 깨고 입을 여는 '방어자(Upstander)'의 길은 결코 꽃길이 아닙니다. 주무관으로서 제가 목격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말한 아이가 어른들의 비정한 행정적 전략의 희생양이 될 때였습니다.

어느 사안에서 한 학생이 피해 친구를 위해 용기 있게 목격 내용을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가해 학생 측은 소송 과정에서 이 학생의 신원을 파악했고, 급기야 그 목격 학생을 '위증' 혐의로 학교폭력 신고를 하는 보복을 감행했습니다. 가해 측 부모의 논리는 집요했습니다. "목격 학생이 평소 우리 아이와 사이가 안 좋아 나쁘게 진술했고, 그 결과로 내 아이가 조치를 받았으니, 이 목격 진술이 잘못된 것임을 밝혀 내 자녀의 조치를 무효화하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타인의 아이를 '거짓말쟁이 가해자'로 몰아세우며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어른의 모습은 아이에게 거대한 공포였습니다. 첫 번째 심의장에 불려 나온 목격 학생은 겁에 질린 채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친구가 불쌍해서 도와주려고 했던 건데, 제가 왜 학폭 가해자가 되어야 하나요? 저는 이제 무서워서 다시는 목격자 진술 같은 거 안 쓸 거예요."


03. 기적 같은 성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쓰겠습니다"

다행히 행정적 절차를 통해 보복성 신고에 대한 조치 결정이 유보되고,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열린 심의장에서 우리는 기적 같은 장면을 마주했습니다. 수개월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낸 그 학생이 다시 위원들 앞에 섰을 때, 아이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그때는 너무 힘들고 무서워서 다시는 안 한다고 했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제가 입을 닫으면 그 친구는 영원히 억울할 것 같았어요. 지금 다시 그때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저는 힘들겠지만 다시 목격자 진술을 쓸 거예요. 그게 맞으니까요."

이것은 단순히 '진술'이 아니라, 한 아이의 영혼이 **'정의의 근육'**을 키워낸 위대한 독립 선언이었습니다. 가해 부모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흔들어놓았던 정의의 가치를, 아이는 스스로의 용기로 다시 세워 올렸습니다. 방관자가 방어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이토록 아프지만,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선 아이의 문장은 그 어떤 법적 논리보다 강력한 공동체의 면역력이 됩니다.


04. 우리가 함께 써야 할 마지막 문장: 방어자를 지키는 울타리

사과라는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힘은 공동체 전체의 몫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용기 낸 아이가 어른들의 이기적인 전략으로 인해 다시 고립되지 않도록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때 네가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네 곁에 있을게."

친구들과 어른들이 건네는 이 나직한 고백이 모일 때, 비로소 '함께'라는 문장이 완성됩니다. 비극은 한 사람의 악의로 시작되지만, 치유는 우리 모두의 선의로 완성됩니다. 침묵을 깨고 함께 쓴 문장들이 교실의 벽면을 채울 때, 학교는 다시는 누구도 혼자 두지 않는 단단한 마을이 될 것입니다.


[나를 향한 물음]

나는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말한 타인의 아이를 공격의 도구로 삼고 있지는 않나요?

'내 아이의 기록'을 지우기 위한 행정적 전략이, 한 아이의 '정의로운 마음'을 얼마나 난도질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나요?

"다시는 안 하겠다"던 아이가 "다시 하겠다"고 마음을 돌리기까지, 우리 어른들이 보여주어야 했던 책임은 무엇이었을까요?

본 도서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전문적인 법률적 조언이나 심리 치료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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