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전주박물관 가기도 전에 전주에서 뽕부터 뽑아버리네!!!
솔직히 이번 여행을 계획하며 가장 공을 들인 건 전주의 박물관 관람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이런저런 복잡한 이유들이 겹치며 휴관이 길어지자
박물관은 어느덧 내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콧대 높은 곳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굳게 빗장을 걸어 잠근 채 좀처럼 틈을 내어주지 않는
그 오만함에 지쳐갈 때쯤 마침내 재개관 소식이 들려왔다.
반가운 초대장 같은 소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다시 문을 닫을지 모른다’는 조바심이 앞섰다.
혹여나 다시 그 문턱이 높아질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설 연휴를 기회 삼아 부리나케 전주로 향하기로 했다.
물론 전주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욕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왕 길을 나선 김에 국립경주박물관도 들러보고 싶어 졌고 이왕 경주까지 간다면
부산이 지척이라는 생각에 부산현대미술관에서의 마무리까지 계획에 넣어버렸다.
결국 짧은 연휴 3일 동안 전주, 경주, 부산을 잇는 그야말로 ‘대장정’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조금 무모해 보이면 어떤가? 별 수 없지! 일단 떠나보고 생각하는 수밖에!!!
그렇게 도착한 전주, 첫 번째 목적지는 한옥마을의 중심이었다.
귀여운 캐릭터들이 반겨주는 카카오프렌즈 전주한옥마을점을 지나 조금만 걸어 들어가니
마을 한복판 넓은 부지에 웅장하게 자리 잡은 경기전과 어진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토록 기다렸던 재개관이었기에 입구에 들어서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박물관 내부로 들어서자 드디어 왕의 초상인 '어진'을 마주할 수 있었다.
복제품이 아닌 오리지널 버전의 어진이 뿜어내는 위엄은
그간의 긴 기다림과 콧대 높았던 휴관의 아쉬움을 단번에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박물관 내부에는 현존하는 어진들에 대한 전반적인 역사부터
어진을 이곳 경기전으로 옮겨오기까지의 험난하고도 장엄했던 대장정의 기록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예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파편적으로만 접했던 토막 지식들이
이곳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짧은 예고편만 감질나게 보다가 마침내 모든 디테일이 살아있는
웅장한 감독판을 정주행 하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렇게 한참을 어진의 세계에 몰입하고 나니 단순히 그림을 본 것이 아니라
조선 왕실의 가장 은밀하고도 숭고한 여정에 동행한 듯한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어진박물관의 숭고한 기운을 가득 안고 경기전을 빠져나와
다시 한옥마을의 골목을 사부작사부작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끄럽게 폴리싱 처리된 스테인리스판이 햇살을 반사하며
존재감을 뽐내는 교동미술관에 다다랐다.
전통적인 풍경 속에 느닷없이 나타난 현대적 세련미가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방문 당시 운 좋게도 무료 전시가 진행 중이었는데
그곳에는 정겨운 민화들이 저마다의 빛깔을 뽐내며 걸려 있었다.
민화 특유의 소박하고도 해학적인 민속미는
미술관의 현대적인 공간과 어우러져 독특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관람객이 적어 마치 미술관 전체를 통째로 빌린 듯한 고요함 속에서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오롯이 작품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대장정의 첫 단추가 이토록 여유롭고 풍성하다니 출발 전의 조바심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경기전과 어진박물관 그리고 교동미술관까지 한옥마을 인근의 정취를 마음껏 만끽하고 돌아가는 길
운명처럼 나타난 풍년제과 본점을 그냥 지나칠 도리가 없었다.
눈앞에 나타난 고소한 빵 냄새는 박물관 여행자의 고고한 자존심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딱 맛만 보자."
스스로와 타협하며 고른 것은 시그니처인 초코파이 하나와 마약빵 하나.
하지만 숙소에 돌아와 한입 베어 문 순간 나의 절제력은 처참히 패배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마약빵을 더 사 올걸' 하는 뼈저린 후회가 밀려왔다.
분명 이번 여행의 목적은 박물관 투어였지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를 찍으러 온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사실 풍년제과 이전에, 우리의 위장을 먼저 사로잡은 뜻밖의 조우가 있었다.
원래 계획은 이름난 돈가스집을 찾아가는 것이었으나
입구에 붙은 야속한 '폐업 선언' 문구에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허탈함에 가던 길을 멈춘 그때 동생이 2시 방향을 가리키며 툭 던진 한마디.
"저기 콩나물국밥집 가볼까?"
별 기대 없이 들어선 그곳엔 단일 메뉴 구성부터 심상치 않은 고수의 포스가 흐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은 숨겨진 맛집 중의 맛집이었다.
국밥 한 그릇에서 나주 곰탕의 성지 하얀집의 향기가 스쳤다면 과장일까?
기가 막히게 된 토렴덕분에 국물은 맑으면서도 깊었고
콩나물은 아삭한 식감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고기 한 점 들어있지 않음에도 당당히 7,000원이라는 가격을 제시하는
그 짬에서 오는 자신감과 더불어 그 국밥 한 그릇이 얼마나 든든했던지
그날은 저녁 식사 생각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계획에 없던 가장 완벽한 만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