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속의 난리부르스 뒤에 찾아온 찻잔 속의 평화
청령포의 뱃놀이와 산림욕으로 비워낸 배를 채우기 위해
오픈 시간에 맞춰 ‘감자바우’로 향했다.
지난 월하휴이 북토크 당시 꼭 가보라는 강력한 추천이 있었던 데다
오직 점심 장사만 한다는 그 ‘콧대 높은 자신감’에
숙소를 나설 때부터 치밀하게 시간을 계산한 결과였다.
다행히 세이프! 우리가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손님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20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영월의 내공이 담긴 음식과 마주할 수 있었다.
다행히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 애피타이저로 내어준 보리밥 덕분에
기다림의 미학을 기분 좋게 누릴 수 있었다.
적절히 돋워진 입맛 위로 마침내 등장한 옹심이!
고소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담백한 그 맛에 반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한 가지 재밌었던 건, 주인분께서 우리가 비운 그릇을 보더니
"보리밥에 양념을 너무 적게 넣은 것 같다"며 매운맛 부족을 걱정해 주신 점이다.
(속으로 외쳤다. '저희 매운 거 못 먹어요... 크크크!')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입구에 '줄줄이 비엔나'처럼 늘어선 웨이팅 행렬을 보며 다시금 확신했다.
여긴 진짜 영월의 '찐' 맛집이구나!
든든한 점심 뒤 동생의 추천으로 향한 곳은 천연 에어컨이 가동 중인 '고씨동굴'이었다.
동굴이니 그저 시원하게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되겠지 싶었는데
웬걸. 나의 와이드 한 체격이 천연동굴의 촘촘한 밀당을 견뎌내지 못했다.
좁아지는 동굴 벽 사이 마치 설계된 것처럼 내 몸이 '끼워 맞춤'으로 걸려버린 것!
억지로 통과하려던 찰나의 의지는 곧 꺾였고
나는 그 자리에서 동굴 탐험에 대한 모든 욕심을 내려놓았다.
동굴 속 비경을 향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왔던 길을 되돌아
입구로 향하는 내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겸허했다.
나와는 반대로 콤팩트하고 매끈한 체격의 동생은 출처 불명의 모험심을 불태우며
동굴 끝까지 끝장을 보고 돌아왔다.
두 시간 만에 입구에 나타난 녀석은 과격한 움직임 탓에
머리까지 푹 젖어 엉망인 몰골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 바리바리 챙겨 온 나의 백팩이 빛을 발할 차례!
그 자리에서 넓적한 수건과 얼음 동동 띄운 커피, 그리고 뽀송한 새 마스크까지
'어셈블리'로 신속하게 교체해 주었다.
차에 돌아와 드라이 샴푸로 마무리 작업까지 마치고 나니
동생은 다시금 쾌적한 여행자의 모습으로 부활했다.
완벽한 케어 덕에 우리는 다시 개운한 기분으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고씨동굴에서 예상치 못한 '난리부르스'를 한판 벌이고 나니
평온했던 타임라인에 비상이 걸렸다.
다음 예약 장소까지 남은 시간은 생각보다 타이트해졌고
이제 우리에게 허락된 중간 경유지는 단 한 곳뿐이었다.
여러 선택지를 앞에 두고 냉정하게 우선순위를 따져야 하는 상황.
과연 영월그랜드투어 2일 차 오후의 '라스트 원'은 어디가 될 것인가.
우리는 짧은 고민 끝에 운명의 목적지를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
세 가지 후보 중 우리의 최종 낙점지는
평소 차 문화와 다구에 관심이 깊은 동생의 취향을 고려한 곳이었다.
정적이 흐르는 한적한 공간에서 전시를 감상하던 중
관장님께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오셨다.
건장한 성인 남자 둘이서 차 전시를 진지하게 관람하는 모습이 자못 신기하셨던 모양이다.
"형제끼리 이렇게 여행 다니는 건 참 보기 드문 그림이네요."
관장님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전시 관람에 참고하라며
귀한 이전 전시 도록을 선물로 건네주셨다.
뜻밖의 호의에 영월의 공기가 한층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관장님의 배려 덕분에 동생은 다구들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관찰하며 탐닉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난 제주 여행 때 오설록티뮤지엄에서
함께 세작을 우려내던 기억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다음 장소로 넘어가기 전, 바쁜 일정 사이에 찍힌 완벽한 '쉼표' 같은 공간.
비록 마당에서 마주친 레트리버의 열정적인 '왕왕'거림에
아주 쪼끔(사실은 꽤 많이) 졸긴 했지만
그마저도 이 한적한 박물관의 생동감 넘치는 매력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