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일어난 여행자가 '품격 있는 고요'를 얻는다
영화관 문을 나서니 영월의 하늘은 어느덧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시계는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하루 종일 쉼 없이 이어진
'그랜드 투어'의 강행군 탓에 배꼽시계는 요란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철학적 질문도 일단 금강산 아니 영월도 식후경이었다.
잔뜩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숙소로 향하는 낯선 밤길을 서둘러 달렸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스박스를 개봉했다.
영월로 출발하기 전 야심 차게 채워 넣었던 식재료들이 드디어 빛을 발할 시간!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기 향기가 번지자 하루의 고단함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정신없이 젓가락을 놀리며 그야말로 '폭풍 흡입'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굶주림을 채우느라 바빠서 여행자로서 놓쳐서는 안 될
결정적인 '무언가'를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침이 밝고 커튼을 걷는 순간 나는 어젯밤 내가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던 숙소 앞의 풍경이 비현실적인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었다.
그 경이로운 광경 앞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래 계획은 그저 소박하게 스파게티 라면 한 그릇으로 아침을 때우는 것이었으나
창밖의 풍경이 곁들여지자 그 한 끼는 세상 어디보다 고상하고 근사한 정찬으로 변해 있었다.
첫째 날의 긴 여정을 마치고 해가 진 뒤에야 도착한 숙소.
밤공기를 마시며 둘째 날의 동선을 그리던 중 동생이 한 곳을 제안했다.
숙소에서 가장 가깝고 영월의 그 어느 곳보다 먼저 문을 연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동선의 효율과 아침의 여유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완벽한 카드.
우리는 망설임 없이 그곳을 2일 차의 첫 번째 경유지로 낙점했다.
사실 작년 12월 <경기 G-MAP 투어> 당시 방문했던
고양의 중남미 문화원과 닮은 구석이 많아 묘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한 나라의 문화적 정수를 한 공간에 응축해 놓은 특유의 밀도 덕분이었다.
가이드북의 상세한 설명을 이정표 삼아 마주한 인도 미술은 그야말로 '다양성의 바다'였다.
점토부터 금속까지 아우르는 다채로운 재료, 정교한 기법 그리고 신화와 일상을 넘나드는 방대한 주제들.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은 인도의 깊은 속살을 들여다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시골 분교를 개조한 듯한 아담한 건물 안에 인도의 강렬하고 특색 있는 컬러들이 가득했다.
이토록 이색적인 조화라니! 이 정도면 누구에게 추천해도 실패하지 않겠다는
확신 혹은 이 공간에 대한 깊은 신뢰가 마음속에 들어찼다.
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관람을 이어가는 사이
조용했던 박물관은 삼삼오오 찾아드는 관람객들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역시 좋은 공간은 발길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법이다.
2일 차의 본격적인 첫 단추, 청령포.
사실 이곳은 더운 날씨에 형이 지쳐 쓰러질까 봐
진지하게 고민한 동생의 눈물겨운(?) 셀렉이었다.
단종의 장릉과 이곳을 두고 저울질하던 중 '그나마 덜 걷는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가 청령포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배에 올라 짧은 강바람을 맞고 울창한 소나무 숲에 발을 들이는 순간
우리의 선택은 '생존'을 넘어 '힐링'이 되었다.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을 길잡이 삼아 동생과 나는 산림욕 하듯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청령포가 품은 비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때로는 장황한 설명보다 고요한 관찰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자원봉사 가이드님의 설명은 열정적이었으나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많아 오히려 공간의 몰입을 방해했다.
나는 과감히 이어폰을 꽂듯 그 목소리를 스킵하고 '녹색창'의 힘을 빌려
관음송 근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텍스트로 이곳의 역사를 숙지하며 깨달은 사실 하나.
굳이 타인의 입을 통해 정의된 설명을 듣기보다
내 눈앞에 펼쳐진 고목의 뒤틀림과 강물 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청령포에는 훨씬 더 어울리는 감상법이라는 것이었다.
청령포를 뒤로하고 나오는 길 입구에 늘어선 엄청난 인파와 마주했다.
그 순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여행에서 부지런하지 못하다는 것은 곧 불필요한 기다림과 거슬리는 소음
그리고 귀찮은 변수들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는 뜻임을.
동생의 제안대로 서두른 덕분에 우리는 그 모든 피곤한 과정을 건너뛰고
청령포의 고요함만을 오롯이 챙겨서 나올 수 있었다.
역시 일찍 일어난 여행자가 '품격 있는 여유'를 쟁취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