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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공여사 Mar 05. 2021

딸기 세 박스와 두루마리 화장지

결정 장애자의23분 쇼핑

"언능 보고 나와. 딱 20분 줄게."

"그래. 노력해볼게."


남편에게는 댕댕이와 따스한 햇볕이나 쬐라 선심 쓰고, 난 마트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요리는 내가 하는데, 장은 거의 남편이 본다. 그 이유는 난 뭘 사는 데 엄청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별로 없는 지식과 신통치 않은 검색 능력을 다 동원하고, 이젠 안경을 벗어야만 보이는 성분표도 다 서서 읽어보고, 만져보고 뒤집어보고, 가격 비교까지 다 한 다음······. 이런 생각이 든다.


근데······, 이거 우리 집에 필요한가? 


마치 미니멀리즘이라도 실천하듯, 그대로 내려놓고 빈손으로  나온다. 그래서 속 터지는 사람은 남편과 딸내미뿐이다.


좋게 말하면 신중한 거고, 뭐, 굳이 나쁘게 말하자면 결정장애다.


그래서 남편은 웬만하면 나에게 장을  보라 안 한다. 나에게 리스트를 받아, 번개 같은 속도로 카트를 가득 채우고 나온다. 누가 보면, 다 거저 가져가라 해서 싣고 나오는 것처럼 동작이 빠르다.


"다 똑같아. 똑같으니까 그냥 사. 아무거나."


남편이 장 볼 때 내세우는 '아무거나' 논리다. 뭐, 선택을 잘하는 논리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단순하지만, 코로나 시대에 참 본받을 만한 생활 철학이긴 하다.


근데 난 '아무거나' 철학이 이해도 안 되고, 실천은 더더욱 안 된다. 피 같은 내 돈을 그렇게 아무거나 사는 데 쓴다고?


그래도 오늘은 뭔 바람이 불었는지 큰 맘먹고 장 보겠다 내가 나섰다.


아무거나 사!

지하에 내려가자마자 딸기 1kg에 6,890원. 우와 싸다. 며칠 전에 10,000원 주고 사 먹었는데. 한 바퀴 돌고 나오면서 집어가야지.


'다 똑같다. 다 똑같다. 아무거나 사자.' 마음도 먹고, 주문도 외우니 신기하게 된다.  미친 속도로 빨간 카트를 채워나갔다.


호박, 시금치, 청양고추,  순두부······. 마구 쓸어 담고 나오는데, 딸기 파는 직원이 의자 위에 올라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한정 타임 세일, 팩만 5천 원."


에엥? 아까 눈으로 찜해둔 그 6,890원짜리를 5,000원에?


" 주세요."


난 과감하게 세 팩을 들어 올렸다. 직원 내가 들어 올린 딸기 세 에 가격표를 재빠르게 붙였다. 바로 옆에서 다른 과일을 만지던 아주머니들이 갑자기 딸기 코너에 코를 박고 전쟁을 벌인다.


휴우, 다행이다.

완전 득템 했다. 15,000원 세 팩이라니.


'나도 말이야,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결정 빠른 것 봤지?'


입꼬리를 귀까지 걸고 일층으로 카트를 밀었다. 얼른 남편에게 딸기 세 팩 무용담을 들려주고 싶다.


이번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두루마리 화장지 코너.  오늘 꼬오옥 화장지사야 한다.

화장지 없다!

코로나로 마트에 머무르는 시간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부담, 남편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부담이 이중으로 작용했다. 다, 똑같아. 다. 그냥 세일한 거 사자.

 

35미터 30 롤 17,900원.


쫌 비싼가? 그때, 농협 아주머니가 어디선가 짠하고 등장하셨다.


"이거 좋아요. 부드럽고. 보통 때보다 세일도 많이 하고."


아무 거나. 아주머니가 좋다는 걸로, 화장지 30개덥석 집어 들었다.


계산 끝내고 박스에 담고 배송 부탁까지.

후딱, 후딱  23분의 기적.  

상큼한 기분으로 마트를 나섰다.


"우와. 나도 되네. 나도 돼. 결정 장애, 이딴 거 극복했나 봐. 23분 만에 장을 보다. 나, 잘했지? 남편!"


마트에서 돈 쓰고 온 게 뭔, 잘한 일이라고 칭찬에 인정까지 갈구해본다. 기분 좋은 햇볕을 이마에 받으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와서 15,000원에 세 팩  딸기도 듬뿍 씻어 맛있게 먹고. 이때까지도 난 결정장애를 극복한 줄 알았다. 늦은 저녁, 딸내미와 동네 마트에 붕어빵을 사러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마트 앞에 산더미처럼 두루마리 화장지가 쌓여있었다.


35미터 30 롤 17,900원.


뭐, 똑같네. 하고 지나치려는 순간.

오 마이 갓.

내 눈에 들어온 숫자와 연산 기호.


1+1.


그걸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야 딸기 싸게 샀다고 흐뭇해하며 평온한 밤을 보냈을 텐데······.



1+1을 본 순간, 내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폭풍우.


그러니까, 왜 아무거나 사고 그래. 잘 비교해봤어야지. 그 농협 아주머니, 한 번 걸리면 안 사고는 못 배긴다는 그 판매여왕 맞지?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은데······. 미쳤어, 미쳤어. 뭔 휴지를 그렇게 비싸게 산 거야?


아니야. 그래도 내가  산 휴지가 더 부드럽고, 더 도톰하지 않을까? 더 친환경적이고······.


뭔 소리야. 요즘 안 부드러운 화장지가 어딨어? 사포처럼 엉덩이 까칠하게 비벼대는 화장지가  있? 있냐고? 더 도톰하면 뭐할 건데? 재활용할 것도 아니고, 요즘 너무 얇 찢어져 일 치르는 화지가 있냐고?

화장지는 '길이'지. 많이 주는 게 장땡이야. 그러니까, 왜 판매여왕 말에 홀랑 넘어가 그걸 샀을꼬?


집에 와서 접시에 씻어놓은 딸기 몇 개 집어먹고, 화장실에 가서 그놈의  화장지를 쥐어뜯으면서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질책했다 한동안 괴로워했다. 윤동주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고, 난 두루마리 휴지 한번 잘 못 샀다고 똥 닦으며 괴로워한다.


"인간은 자기를 속이거나 확신하고, 자기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며, 자기를 받아들이거나 밀쳐낼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자네, 좌뇌한테 속았네!> 크리스 나이바우어


휴우, 깊은숨을 내쉬며 화장실을 나온다.


딸기 세 팩에 좋아하고, 1+1 화장지에 괴로워하고.


그니까, 그동안 마음공부한 다 어디 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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