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완벽주의
나는 의사에게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았다.
"휴직하면 이런 거 저런 거 하려고 막 계획을 세웠거든요.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다 망쳤어요. 아이들과 하루 종일 있어야 해요. 밤에 뭔가를 하려고 해도 낮에 시달린 탓인지 피곤해서 곯아떨어져요. 그러면 또 하루가 지나가버려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패배감을 느껴요. 오늘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을 낭비하겠구나. 이런 생각을 떨 칠 수 없어요."
"어떤 일을 하고 싶었어요?"
나는 그에게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주욱 설명했다.
1. 심리상담받기
나는 2013년부터 우울증과 동거 중이다. 수년 동안 우울증은 여러 번 재발했고, 약을 먹어도 '완치'는 없었다. 늘 같은 자리에 걸려 넘어졌으며,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믿은 순간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실제로 의사는 1년 전부터 내게 심리상담을 병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2. 블로그/ 브런치에 글쓰기
늘 혼자 글을 쓰고, 혼자만 읽었다. 잘 쓰든 잘 쓰지 못하든 공개된 공간에서 내 글을 공유하고 싶었다. 블로그든 브런치는 어떤 곳이든 상관없다. 꾸준히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3. 재테크 공부하기
돈 공부는 생존에 필수라지만 나에겐 머리 아픈 이야기일 뿐이었다. 부동산, 주식, 경제. 뭐든 해야만 했다. 경제와 재테크 관련 서적을 몇 권 사서 읽었지만 너무 힘들었다. 이번엔 시간이 많으니 제대로 공부해야겠다.
4. 피아노 연습하기
악기를 배우고 싶었다. 10대 시절, 무려 6년이나 피아노를 배웠지만 지금은 악보조차 제대로 읽지 못한다. 집에 피아노가 있으니 쉬운 악보집부터 사서 독학으로 공부하자.
5. 요가/필라테스 배우기
의사는 내게 운동을 권유했다. 자신에게 맞는 운동을 찾으라고. 나는 걷기가 좋았지만 구부정한 자세와 굽은 어깨 때문에 필라테스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집 근처에 있는 괜찮은 학원을 찾아봐야겠다.
6. 학급운영 노하우 익히기
교사지만 여전히 담임을 맡기 두렵다. 학급 운영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무 탈 없이 1년을 보내고 싶었다. 학생들과 원만히 지내고 싶었다. 담임으로서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관련 책을 읽고 공부해야겠다.
2020년 3월, 나는 육아휴직을 했다. 그동안 직장을 다닐 때 하지 못했던 일을 꼭 하고 싶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째를 돌보는 일이 우선이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시간을 육아에 허비하긴 싫었다.
내가 세운 계획은 아이들이 각자 등교와 등원한 것을 가정으로 세운 것이었다. 그러니 코로나라는 변수도, 개학이 늦춰진 상황도, 유치원에 아이를 보낼 수 없는 현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 계획을 당장 실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난 지금 책을 읽고 공부를 하거나 필라테스를 배우러 가야 하는데 아이들 때문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짜증과 화가 치솟았다.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못마땅했고, 그 시간이 아까웠다.
그는 조용히 듣고 나서 이렇게 물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어때요?
그의 질문을 듣는 순간, 내 고민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처럼 멍해졌다.
그는 내가 만난 세 번째 정신과 의사이다. 그리고 지금껏 만난 의사들 가운데 제일 좋다. 순전히 내 개인적인 감정이 투영된 판단이지만 말이다. 건조하지 않고, 내담자인 나를 최대한 이해하고 공감해주려는 자세를 보인다. 상투적인 조언이나 충고도 잘하지 않는다. 고민을 털어놓으면, 언제나 다시 묻는다.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질문을 통해 나 스스로 해결책을 찾도록 돕는다.
나는 한 발짝 떨어져서 내 고민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왜 재테크를 공부하고, 피아노를 쳐야 하지? 왜 좋아하는 걷기 대신 필라테스를 배워야 하지? 내게 제일 중요한 일은 뭐지? 난 이미 수년을 우울증과 함께 했고, 오랜 직장생활로 많이 지쳐있는데. 게다가 난 '육아'휴직을 한 거야.
잠시 후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할 필요가 없어요."
그가 빙그레 웃으며 내게 말했다.
"지금 당신에게 제일 중요한 일은 '회복'이에요. 올 한 해는 그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게 어떨까요?"
그동안 나는 어떤 시간이든 계획적으로 보내야 하며 낭비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초조했다. 그래서 일단 그 마음을 버리기로 했다. 코로나가 잠잠해져서 아이들이 모두 유치원과 학교에 갈 때까지 모든 일을 미루기로 했다. 의사가 모든 일을 미루고 시간을 낭비해보라고 조언했고, 사실 그 모든 일을 미루고 하지 않더라도 문제 따윈 생기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