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완벽주의
의자에 앉아 비스듬히 벽을 바라보았다. 뭘 말해야 할까? 얼른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내 이름이 언제쯤 불릴까? 예약시간은 훌쩍 지났는데. 혹시 나를 잊었나? 아니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아직 남아 있네. 이 문제는 이렇게 말하고, 저 문제는 저렇게 말해야지. 질문과 다짐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채웠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퇴근길 꽉 막힌 도로가 내 머릿속 같다. 마음을 비우는 일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일도 어렵다. 쉬운 일은 쉽게, 어려운 일은 더 쉽게. 나는 숫자를 세며 질문과 걱정을 잊어버리려고 애를 썼다. 그럴수록 생각이 나를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번엔 오른쪽 다리를 마구 떨었다. 다리를 떠는 행동이 몸에 좋다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주위를 힐끗 보니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드디어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천천히 그리고 커다랗게 내쉬었다. 의사가 예의 그 질문을 한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좀 어지러워요, 지금."
"왜요?"
나는 내가 지금 느낀 불안과 원인 분석까지 거침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진료실에 들어오면 제가 느낀 문제를 제대로 말해야 할 것 같아요. 그거 생각하고 기억하느라 애를 많이 썼어요. 불안과 강박이죠.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알아요. 완벽주의 성향과 관련 있고..."
돌연 그가 웃었다.
"으헤헤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3년째 그를 만나고 있지만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웃음소리였다. 아주 친숙하고 편안한 대상 앞에서 낼 법한 웃음. 사회적 체면이나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고, 어색한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거나 적당히 할 말을 찾지 못해 일부러 웃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순간이 재미있어서 웃는 웃음. '이 환자가 우울증을 오래 앓더니 반은 전문가가 되었네.' 이런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문제점을 말하고 스스로 원인 분석까지 하는 환자가 신기해서 그랬을까?
나는 그의 웃음소리가 정말 좋았다.
"만약 당신이 생각한 문제를 이 시간에 다 말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아요?"
아, 익숙한 상황이다.
내가 걱정과 불안으로 미칠 것 같을 때 상담사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나의 걱정이 괜한 것임을 일깨워주려는 질문이다. 또 이 말을 했더니 의사가 "으헤헤헤" 웃는다. 해결책이 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제 나 자신에 대해 꽤 잘 안다고 '착각'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도 내가 웃겨서 그와 같이 웃었다.
"적절한 조언을 못 듣거나 약 처방을 제대로 못 받을 수 있어요."
"만약 중요한 문제를 말할 기회를 이번에 놓쳤다면 전화로 진료예약을 다시 하면 됩니다. 약 처방의 경우도 용량 조절을 급격하게 하지 않으니 큰 상관이 없고요. 당신이 설령 당신의 문제를 잊었더라도 제가 어느 정도 질문을 통해 문제점을 끄집어낼 수 있어요. 음, 저에게 오는 환자분의 2/3 가량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이 자리에 앉으시고요. 어떤 분은 말할 내용을 메모해오기도 해요."
이번엔 내가 커다랗게 웃었다. 내 걱정이 얼마나 하찮았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니 정말 불안하다면 메모를 해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나는 그에게 요즘 나를 괴롭히는 몇 가지 불안과 강박증에 대해서 말했다. 이번에도 원인 분석까지 정확하게 했다.
"확실히 우울은 예전만큼 심하지 않아요. 우울이 지나가니 불안과 강박이 찾아오네요."
"다시 약 복용량을 늘리기엔 아깝고요, 일단 지난번처럼 그대로 먹어볼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그의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근데요."
나는 사뭇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끔은 이런 강박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뭐랄까, 삶의 희열을 느껴요."
그가 뭔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쾌감이요. 몸 안에서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아무튼 그래요. 제가 정상은 아닌 것 같죠?"
그가 또 "으헤헤헤"하고 웃었다.
"비정상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가 말을 아꼈다.
"정상 범주는 아니죠." 내가 대신 이야기하며 싱긋 웃었다.
염려 마세요,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니니까요.
진료실을 나왔다. 진료 예약을 잡고, 처방받은 약이 나오기까지 잠시 서서 기다렸다. 닫힌 진료실 문을 바라보며 다음 진료 때도 그의 소년 같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길 기도했다.
순간, 이듬해도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다면 그건 나의 우울이 탓이 아니라 의사의 웃음소리 때문이라고,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계속 남아서 나를 흔든다고, 이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고는 혼자 싱긋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