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가 있는 가족의 삶

모두 조금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by 키키 리리

1.

결국 손바닥 위에 약을 올려놓았다. 밤마다 먹는 신경안정제 한 알을 반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약을 먹지 않는 날에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자주 깼다. 괴로운 일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끔찍한 악몽과 식은땀. 몸에 걸친 옷이 몽땅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렸다. 땀이 식으면 덜덜 떨면서 이불로 몸을 휘어 감았고,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워지면 옷을 갈아입었다. 악몽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생생해서 실제 겪는 일처럼 고통스러웠다. 건물이 무너지는데 미처 도망가지 못한 나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대한 나무 조각들이 내 머리로 떨어졌고, 못 네 개가 박힌 채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쨌든 살아야 했기에 누군가가 손을 뻗어 못을 잡아당겼다. 꿈은 끔찍할 정도로 생생했다. 끙끙거리며 괴로워할 때면 옆에 자던 딸이 내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2.

학교에 다녀온 날이었다. 괜찮을 것 같았지만 막상 자려고 누우니 가슴이 답답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점점 좁아지더니 나를 납작하게 짓눌렀다. 나는 참지 못하고 약봉투를 뜯어서 한 알을 반으로 쪼개서 삼켰다. 다시 자리에 누웠는데 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나에게 자신의 피카추 인형을 건네주었다. 엄마가 안고 자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최애 인형을 나에게 양보한 것이다.



3.

먹지 않고 모아둔 약이 제법 많다. 나랑 맞지 않아서, 혹은 증상이 호전되어서 남겨둔 약. 내게 쓸모없는 약이지만 차마 버릴 수는 없었다. 수십 개의 알약을 보며 '저걸 몽땅 삼켜버린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라는 위험한 생각에 잠기곤 했다. 남편에게 넌지시 말했더니 요즘은 약이 좋아져서(?) 몽땅 삼켜도 위만 버리고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래, 죽지는 않겠지. 하지만 괴로운 일이 생기면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잖아? 안 그래? 그래서 저 약을 서너 알 정도 삼키면 좀 길게는 잘 수 있지 않을까? 나 예전엔 잠들 때마다 아침에 눈뜨지 않게 해 달라고, 죽고 싶은 건 아니고 그저 오랫동안 잠만 잘 수 있게 해달라고 빈 적이 많단 말이야.' 이 말은 남편에게 하지 않았다. 내가 실행에 옮기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고, 내가 남편에게 바란 건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뿐이니까.

요새는 다른 방법으로 그의 사랑을 요구한다. 쉬고 있는 남편의 다리에 매달려서 어리광(?)을 부린다. 그러면 그가 내려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나 지금 사랑이 부족해." 그러면 남편은 하는 일을 멈추고 나와 대화를 시작한다.



4.

얼마 전 부모님과 식사를 했다. 복직을 앞둔 딸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심경은 복잡했다. "네가 좀 강해져야 할 텐데... 잘하겠지? 네가 마음이 여려서 말이야." 이런 소리를 이미 몇 차례 들은 나는 참지 않았다.

"저 잘할 수 있어요. 잘할 거예요. 걱정 마세요."

"... 그래, 그래."

"그리고 제가 약해서 우울증에 걸린 건 아니라고요. 제 탓이 아니에요."

이 말엔 아버지가 잠시 머뭇거리셨다.

"우리가 잘못 키웠지."

엄마는 듣는 내내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나는 틈만 나면 스스로 말한다. "난 잘할 거야. 잘할 수 있어. 아니, 좀 못해도 괜찮아. 못하면 그때 가서 생각해보지, 뭐." 눈물을 대롱대롱 달고 마음에 꾹꾹 새긴다.


난 부모의 불안을 전해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넌 잘할 수 있을 거다.'는 믿음만 필요했다. 그 믿음을 나는 평생 동안 받지 못했다, 단 한 번도. 내가 이 모양으로 살게 된 것이 온전히 부모님 탓은 아니지만 솔직히 슬플 때도 많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부모님이 안쓰럽다. "우리가 잘못 키웠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그 말을 하는 아버지 마음이 말이 아닐 정도로 쓰릴 것 같아서 식사를 마치고도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아픈 자식을 둔 부모님은 나로 인해 인생을 되돌아보고 잘못을 고칠 기회를 얻게 된 것일까? 그건 부모님 몫이니 내가 고민하지 않으련다.




상처를 준 사람도, 상처를 받는 사람도, 사랑을 나눠주는 이도, 사랑을 받는 이도 모두 뒤섞여있다. 한 사람이 상처만 주는 일도 없고, 상처 받은 이가 사랑을 나눠줄 수도 있다. 가족이기에 쉽게 용서할 수 있고, 가족이라서 쉽게 용서할 수 없다. 우린 모두 조금씩 이상하고 서툴고 꽤나 다른 사람이지만 그럭저럭 하루를 함께 보낸다.


*사진 출처: Scott Webb,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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