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학교에서 교무기획 업무를 했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다음과 같다.
교육계획서, 인사(초빙, 전보, 퇴직), 학교현황 및 교원실태조사, 다면평가(성과급), 학교자체평가, 지구별 자율장학, 입학식, 졸업식, 진급졸업 업무, 신학년도 준비 워크숍, 업무분장, 보결 강사와 기간제 교사 채용 및 관리, 방학계획, 부서 내 기타 업무 지원
교육지원청에서 내려온 공문이 워낙 많았다. 제출해야 할 자료와 기안해서 올려야 할 자료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신경을 바짝 썼다. 교무기획을 맡았던 첫해엔 위가 너무 아파서 위 내시경을 생전 처음으로 받았고, 두 번째 해엔 우울증이 재발했다. '절대 틀리면 안 된다.'생각 때문에 공문을 보고 또 보고, 제출할 자료를 거듭 확인했다.
정신적으로 점점 고갈되었다. 몸은 나날이 말라갔고 겨우 하루 한 끼를 먹었다. 식욕은 뚝 떨어졌고 잠도 잘 자지 못했다. 영문을 모르는 자식들에게 짜증과 화를 내기 일쑤였다.
2019년 가을, 우울증이 재발해서 정신과에 갔다. 심각한 우울증이었다. 우울증 수치 최고점이 100이라면 난 98점이었다. 게다가 사회불안장애까지 있었다.
이때까지 만난 3명의 정신과 의사와 2명의 심리상담사 모두 내게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고 말했다.
오랜 상담과 치료 끝에 나는 완벽주의와 조금씩 결별 중이다.
오늘 학교에서 2건의 공문을 기안해서 올렸다. 기안을 올리기 직전 가정통신문 여백이 맞지 않다는 사실을 찾았으며, 표의 2번과 3번 순서가 뒤바뀐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기안을 올린 뒤 오타 하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 글을 읽고 이해하는데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전달하고자 하는 글의 내용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여백을 조정하거나 표를 바로잡거나 오타를 고쳐서 기안을 다시 올릴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사람이 죽거나 다치거나 돈을 횡령하거나 성적을 조작하는 일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실수를 스스로에게 허락했기 때문이다.
두 명의 결재자는 내가 기안한 공문을 살펴보고 아무것도 지적하지 않았다.
완벽주의자는 기준이 너무 높다. 그 기준이라는 것 역시 워낙 주관적이라서 남들이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많다.
내 주치의는 항상 이렇게 주문한다.
1. 의도적으로 실수를 하세요.
2. 실수를 해도 괜찮다는 경험을 하세요.
3. 그리고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잘 관찰하세요.
3번의 주문은 나처럼 기준이 높고 무엇이든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완벽주의자에겐 좋은 귀감이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실수를 해도 그럭저럭 잘 지내고 별 탈 없이 산다는 사실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한다.
내일도 멋진 실수를 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