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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키 리리 Sep 07. 2023

자책 대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얼마 전의 일이다. 


전 교사가 모여서 직원회의를 했다. 사회자는 안건에 대해 누구든지 빠짐없이 발언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발표시간은 3분을 넘지 않아야 하며 자신의 의견이 찬성인지 반대인지 정확하게 정해서 근거를 제시해야 했다. 


말하는 일은 늘 어렵고 힘들다. 특히 내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하거나 누군가를 설득해야 할 경우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두뇌가 팽팽 돌아가지 않는다. 눈앞의 시간을 정지된 것처럼 느낀다. 모두 나를 지켜보는 듯한 숨 막히는 순간을 거대한 바윗돌처럼 생각한다. 팽팽하게 조여진 줄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막 끊기기 직전의 그 긴장감이 무섭다. 


이런 상황이니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미루고 또 미뤘으나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 내 차례가 다가왔다. 

마이크를 잡고 1분 40초가량 발표했다. 말을 더듬거리며 한 말을 또 하고, 공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십시오체가 아닌 해요체를 쓰며 말꼬리도 흐릿하게 얼버무렸다. 


마이크를 놓는 순간 해방되었다는 시원한 감정보다는 곧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바로 자책이다.


"나는 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을까?"




이런 자책은 평생토록 나를 따라다녔다. 어떤 행동을 해도 어떤 말을 해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특히 우울증과 관련해서 나를 길게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있다. 


"나는 왜 제때 치료를 하지 않았을까?"


2013년에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았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약을 복용한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뒤였다. 치료를 받지 않고 자연적으로 낫길 바라며 보낸 세월은 자해와 자살충동, 폭식과 구토, 짜증과 화 등으로 점철되어 나날이 수렁 속으로 처박혔다. 우울증에 대한 무지와 막연한 희망 탓이었다.


내가 제 때 치료를 시작했다면 이토록 오랫동안 우울증을 달고 살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늘 나를 따라다녔다. 그 시절 내가 병원 진료를 거부한 이유는 오로지 아이 때문이었다. 생후 100일도 되지 않은 아이를 두고 약을 먹을 순 없었다. 나보다 아이가 더 소중했다기보다는 당연히 산모는 아기에게 모유수유를 해야 한다는 비상식적인 신념 때문이었다. 이 그릇된 신념에 사로잡혀 나를 돌보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았고 결국 후회와 자책으로 나를 비탄 속에 밀어 넣었다. 




2020년에 20회기에 걸쳐 심리상담을 받았다. 상담사는 무척 좋은 분으로 나와 잘 맞았고 나의 트라우마를 끄집어내서 치유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앞서 마이크를 놓자마자 후회가 밀려왔을 때, 그에게 배운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를 떠올렸다.


"왜 그랬을까? 대신에 '나를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로 생각을 바꿔봐요. 자책 대신 나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주는 거죠."


나는 그에게 배운 대로 마음을 바꿨다.


"나는 여러 사람 앞에서 허둥댈 수밖에 없었구나.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리고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부담감이 컸구나."


이렇게 생각을 바꾸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치료 시기를 놓친 일에 대해서도 생각의 방향을 바꿨다. 당시 나는 비합리적인 신념에 빠져 있었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우울증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해서 시간이 지나거나 환경이 바뀌면 혹은 아기가 좀 더 크면 나아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지금의 나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 테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다. 


자책 대신 나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하자 변화가 일어났다. 나 자신에 대해 만족스럽지 못한 순간이 줄어들었고, 나에 대한 미움과 원망보다는 이렇게 행동하고 말하는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물론 한 번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한두 번 생각의 변화를 줬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방법을 아니까 내게 남은 것은 실천하겠다는 의지다. 


잘 되든 잘 되지 않든 결과야 어떻게 되든 나는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쪽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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