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엄마는 내게 과자나 라면 따위를 못 먹게 하셨다. 그런 음식을 자주 먹었다간 뚱뚱해질 거라는 이유였다. 불행히도 나는 무엇이든 잘 먹는 어린이였다. 밥 먹으라고 엄마가 부르기 전에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고, 밥을 남기거나 안 먹겠다고 투정도 부리지 않았다. 이런 내가 과자나 라면까지 먹게 된다면 비만의 길로 접어들겠다는 엄마의 걱정은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과자와 라면이 얼마나 맛있는지, 얼마나 군침을 흘리게 하는지 말이다. 아기공룡 둘리에서 마이콜이 "정말 정말 맛 좋은 라면~"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떠오른다. 마이콜도 홀리는 라면 맛이니 나라고 별 수 있을까?
라면을 먹으려면 엄마의 눈치가 그렇게 보였다. 자꾸 이런 것들을 먹다간 넌 뚱뚱해질 거라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했다. 물론 엄마는 내가 라면을 먹을 때마다 잔소리를 하지는 않으셨다. 부모 말에 고분고분 따르던 예민한 어린이는 엄마가 하지도 않는 잔소리를 현실로 듣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도 라면을 먹으면 죄책감을 느낀다. 유년기에 각인된 상처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엄마의 목소리는 아주 오래 사라졌지만 그 망령은 여전히 곁에 남아 나를 위협한다.
(라면이나 과자를) 자꾸 먹었다간 뚱뚱해질 거라는 엄마의 목소리는 내 무의식 속에서 알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이렇게 변형된다.
"넌 뚱뚱해질 거야."
구토의 시작은 임신 중 입덧이었다. 멈추지 않는 입덧은 늘 메스꺼움과 구토를 유발했다. 식중독이나 배탈로 인해 빚어지는 구토 외에는 의식적으로 구토를 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새로운 세계였다. 메스꺼움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구토는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변질되었다가 비만을 방지하기 위한 나만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식을 한다. 게다가 아주 빨리 먹는다. 순식간에 입 속으로 음식을 밀어 넣는다. 그리고 죄다 토해버린다. 뚱뚱해질까 봐, 살이 계속 찔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토 후 느껴지는 후련함에 중독되었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내는 즐거움. 그 황홀한 고통을 잊지 못해 나는 자주 토했다.
지금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이제 학교 급식을 먹고도 토하는 점이다. 청소년의 건강과 발달에 초점을 맞춘 급식은 40대인 내가 먹기엔 고칼로리 음식이 많았다. 게다가 식욕을 억제하지 못해 항상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먹고 나면 후회했다. 이대로 소화가 된다면 살이 더 찔 텐데-.
살이 찌면 안 된다는 강박이 구토를 불러왔고 나는 그렇게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진 화장실에서 먹은 것을 모조리 게워냈다.
급식 당번이 아니거나 5교시 수업이 없다면 나는 되도록 점심 식사 후 운동장을 몇 바퀴 돌려고 노력 중이다.
나의 첫 번째 정신과 의사는 구토를 하는 내게 조금씩 자주 먹고 무조건 걸으라고 조언을 했다. 조금씩 자주 먹는 것은 힘드니 걷기라도 해서 구토를 방지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잘 안 된다.
토하고 싶은 충동을 이기기 너무 힘들다. 하지만 더 힘든 것은 보는 눈이 없는 화장실을 찾아 재빨리 이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토한다는 걸 누군가가 알게 될까 봐 두렵다. 구토 후 냄새가 나는 것도 신경 쓰인다. 향기가 나는 비누로 손을 바락바락 씻고, 열심히 양치질을 해도 내 몸에서 냄새가 날까 봐 신경이 예민해진다.
무엇보다도 오늘도 또 토해버렸다는 절망이 나는 더욱더 짓누른다.
나는 언제쯤 해방될 수 있을까?
이게 내 의지로 가능한 영역의 문제인지 이제는 헷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