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었다. 5일 만에 학교에 온 연우(가명)에게 잠시 복도로 나오라고 말했다.
"많이 힘드나?"
"네."
"뭐가 힘든데?"
"다 힘들어요."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겨우 진정시키고 말했다.
"그래, 그럴 거야. 이렇게 학교에 나와줘서 고맙구나. 오늘 병원 잘 갔다 와."
나는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연우는 매주 금요일마다 심리상담을 받으러 간다. 오전 8시 반에 학교에 와서 8시 50분에 집으로 돌아간다.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지병이 있고 마음 역시 아파서 다니는 병원도 많다. 수년 째 친척집에 살고 있다. 연우의 출석부는 병결과 병조퇴, 병지각으로 어지럽다.
나는 교무실로 돌아와 연우가 내게 건넨 처방전을 들여다보았다. 우울증 환자인 내게도 익숙한 약 이름이 보였다. 그리고 하나는 나와 먹는 약이 겹쳤다.
이 작고 작은 아이가 나와 같은 약을 먹고 있구나-.
우울증이 있다는 사실을 익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처방전으로 확인하니 마음이 쓰라렸다.
'사실 선생님도 너와 같은 약을 먹고 있어. 네가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없지만 그래도 혼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
결코 하지 못할 말을 주워 삼키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연우가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마다, 매일 아침 그의 보호자와 연락을 할 때마다, 지나가는 우리 반 학생들에게 연우가 학교에 왔냐고 물을 때마다 그리고 등교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 그 수많은 나날 속의 연우를 떠올릴 때마다 그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슬펐다.
나는 왜 너의 슬픔을 가져갈 수 없을까?
나는 왜 너의 슬픔을 덜어줄 수 없을까?
금요일 아침, 연우와 짧게 나눈 대화 속에서 나는 무력함을 느꼈다. 담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는 사실도 느꼈다.
담임이 힘겨웠던 이유는 많고 많지만 그중 하나는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담임에게 쏟아지는 민원으로 머리가 아플 때면 내가 도대체 왜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 자괴감이 밀려왔고 가슴이 답답했다. 답이 없는 문제도 많았다. 하지만 연우는 또 다른 케이스였다. 그 아이의 마음의 문제였다.
연우 때문에 학교 상담사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선생님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상담사가 무척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이제는 상담사가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노력해도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연우가 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제인지도 모르는 그 시점으로 돌아가 학교를 꼬박꼬박 다니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수업을 신나게 듣도록 도울 수는 없다. 연우의 문제는 내가 아닌 가정과 병원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연우를 돕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연우의 슬픔을 덜어주고 싶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내가 연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내 한계를 알아야 나를 지키며 일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로 나를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그 한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 일은 바로 연우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학교에 왔을 때 따뜻하게 대해주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고 슬며시 미소를 보내주는 일이다. 이건 어렵지도 않고 내가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토닥여주고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일은 잘할 수 있다. 오히려 어려운 일은 학생들을 엄하게 대하는 것이다.
내가 연우의 슬픔을 가져갈 수는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만 그의 곁에서 오래오래 남아 그가 학교에 돌아오기를 기다려 줄 수는 있다.
어떻게 말인가?
다정하게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말이다.
나는 그렇게 연우를 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