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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키 리리 Sep 25. 2023

견딜 수 없는 시간을 견디다

퇴근하기 15분 전이었다. 나와 같은 학년 수업을 맡은 동료교사가 내게 시험문제 출력물을 건넸다. 원안 제출은 내일까지인데 이제야 준 것이다. 그가 낸 문제를 검토하고 편집 상태를 점검하려면 적어도 1시간 이상은 필요했다. 


내가 난감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하세요."


그의 당당한 태도에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퇴근시간 직전에 일을 건네준 것도 모자라 집에 가서 초과 근무를 하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그를 보며 그동안 쌓인 울화가 터질 것 같았다. 관리자도 함부로 퇴근 후 업무 지시를 하지 못하는데 그가 뭐라고 내게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성질이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시험문제를 받았다. 누가볼세라 가방 깊숙이 시험문제를 넣어서 집에 왔다. 





나는 강박증이 몇 가지가 있다. 자물쇠에 대한 강박증이 심해서 잠금장치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가스밸브는 물론이고 차 문, 현관문, 노트북이 들어있는 책상 서랍, 학생들의 수행평가지를 모아놓은 서랍장 등은 잘 잠겨 있는지 꼭꼭 확인한다. 심할 때는 간 길을 한참 되돌아가서 다시 확인하곤 했다. 자꾸 당겨서 확인하는 바람에 잠금장치를 고장 낸 적도 있다.


지금은 그 정도로 확인하지 않는다. 한 번 확인하고 뒤돌아나간다. 다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 마음을 견디려고 노력했다. 확인하고 싶다고 바로 확인하지 않고 5분, 10분, 15분. 이런 식으로 조금씩 시간을 늘려가며 견디다가 나중에 한 번만 확인하는 순간까지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당장 확인하지 않더라도 큰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지난날의 경험이 큰 몫을 했다. 




나는 지금 시험문제를 앞에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원안제출은 내일까지고 검토를 오늘 끝내야 내일 여유 있게 수정해서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료교사가 늦게 줬다. 난 당장 검토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퇴근 후 도저히 시험문제를 쳐다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누를 끼칠까 봐 지난주에 내가 출제한 문제를 미리 건넸다. 그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자신이 낸 문제를 준 셈이다. 그가 늦게 줬다고 해서 퇴근 후 내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지만 곧 결심했다. 


당장 시험문제를 확인해서 해결하고 싶은 마음을 견디기로 말이다. 예전에는 이 시간을 견딜 수 없어서 내 시간을 희생하면서까지 일을 처리했다. 당장 확인하고 싶은 마음, 당장 처리하고 싶은 마음은 둘 다 같다. 확인하지 못하고, 처리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렸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조금 늦게 확인하더라도 아니 확인을 하지 않더라도 나는 잘해왔다. 그리고 큰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는 나를 믿고 내일 오전에 시험문제를 검토하고 오후에 수정해서 제출하는 걸로 가닥을 잡았다. 하다못해 하루 늦게 고사원안을 제출하더라도 담당자가 이해해 줄 것이라는 나름의 전략도 있다. 이렇게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미루기

미뤄도 큰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시간을 견뎌보기


다 좋다.


나는 이렇게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방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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