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리 『긴긴밤』
매년 한 학기 한 권 읽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1학기에 중3 학생들을 대상으로 『긴긴밤』을 함께 읽었습니다. 학교 예산으로 25권의 책을 샀어요. 제가 이 책을 아주 감명 깊게 읽어서 학생들에게도 읽을 기회를 주고 싶었거든요.
(자자, 자신의 책이 안 팔린다고 여기는 분들은 청소년 대상 소설을 쓰시면 됩니다. 국어 교사에게 선택만 되면 한꺼번에 수십 권씩 판매량이 늘어납니다. 전국의 중고등학교를 떠올려보세요. 셀 수 없이 많죵? 특히 창비나 문학동네에서 상이라도 받으면 판매량은 자동 보장됩니다. 하지만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 저도 못해요ㅠㅠ)
한 권의 책을 선택하기 위해서 참으로 다양한 청소년 소설을 읽었습니다만 그중 『긴긴밤』이 참 좋더라고요. 어떤 점이 좋았는지 제가 예전에 쓴 글을 다시 올려봅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바라보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자기 전에 책을 읽은 탓이다. 그것도 『긴긴밤』을.
'나'로 사는 일의 괴로움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흰바위코뿔소 노든은 편안한 삶이 보장되는 고아원에서의 삶을 버리고 초원으로 나간다.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는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15쪽)
코끼리들과 같이 사는 일은 무척 행복했지만 자신에게 왜 긴 코 대신에 코뿔이 있는지, 자신이 왜 코뿔소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주저하는 그에게 코끼리 할머니는 망설이지 말고 떠나라고 말한다. 그렇게 초원으로 나온 노든은 자연이 주는 평화와 경이로움을 맘껏 느끼고 자신과 같은 코뿔소를 만나 가족을 이룬다. 그러나 코뿔을 노리는 인간 때문에 아내와 딸을 잃고, 다리까지 다친 노든은 파라다이스 동물원에 갇혀 살게 되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노든은 모든 것을 부수고 인간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냈다. 또 다른 코뿔소였던 앙가부는 그를 달래고, 같이 동물원을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동물원에서 태어나 자란 앙가부는 초원에서는 바람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는 노든의 말에 감격했기 때문이다.
그래, 코뿔소는 달려야지.
앙가부 역시 코뿔소로 살기를 원했다. 평생 우리에 갇혀 사는 것보다 위험하지만, 무슨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바깥세상으로 나가길 원했다. 그러나 또다시 시련이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앙가부는 죽고, 노든은 코뿔도 잘린 채 세상에 남은 마지막 '흰바위코뿔소'가 되어 여전히 동물원에 있었다.
노든은 자신의 선택이 이런 결말을 가져오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가족을 잃고, 친구도 잃고, 자신도 망가졌다. 이쯤 되면 '후회'라는 단어가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삶이 온통 절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내 선택이 나를 아프게 찔러댈 때 누구나 후회한다. 하지만 노든은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절대 후회하지 않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때 고아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나'를 있게 한 모든 존재들에게 인사를
전쟁이 나서 동물원이 파괴된다. 앙가부와 노든이 그렇게 넘고 싶었던 철조망이 사라졌다. 노든은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무슨 일이 자신을 기다리는지 모르는 곳으로.
펭귄 치쿠는 찌그러진 양동이에 검은 반점이 있는 알을 넣고 그를 따라간다. 사실 치쿠가 무작정 노든에게 바다로 같이 가자고 말했다. 펭귄은 바다에 살아야 하고, 곧 알에서 아기 펭귄에 나올 테니. 성질 더러운 치쿠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댔고, 노든은 그가 떠들어대는 통에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둘은 바다가 보일 때까지 긴긴밤을 서로에게 기댄 채 보냈다.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알을 돌봐주겠다고 약속해 줘."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코뿔소라고. 알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을뿐더러 알을 품지도 못해. 그런 소리 할 여유가 있으면 조금만 더 힘을 내."
"난 이제 너밖에 없잖아."
노든은 이런 얘기가 싫었다. 그래서 대충 대답해 버렸다.
"알겠어."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알을 품어서 꼭 새끼 펭귄이 무사히 태어나게 하겠다고 약속해 줘."
"알겠어. 알겠다고."
"그 애를 바다에 데려다준다고도 약속해." (71쪽)
치쿠는 죽었다. 치쿠는 노든에게 슬퍼할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노든은 알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또다시 긴긴밤이 찾아왔다. 밤이면 코끼리 떼에 둘러싸여, 아내와 딸과 함께, 앙가부와 같이, 치쿠와 나란히 잠들었지만 다시 혼자가 되었다. 노든은 외로웠다. 하지만 노든은 자신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이 책은 노든의 품에서 태어난 펭귄이 자신의 아버지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자신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긴 코와 코뿔을 맞대거나 다친 눈이 되어주거나, 부리가 해질 때까지 양동이를 물고 다닌 존재에 대해서.
긴긴밤을 노든과 아기 펭귄은 같이 보냈다. 무엇하나 닮은 점이라곤 없지만 그들에겐 서로가 전부였다. 노든이 마침 동물원에 있지 않았다면, 치쿠와 윔보가 버려진 알을 주워 품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자신은 태어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노든의 말에 나는 그저 살기 위해 살아낸다고 말한 펭귄이지만 나중에서야 노든의 말을 이해한다. 자신의 생명이 수많은 존재들에게 빚졌다는 것을. 그들이 없다면 자신 역시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문득, 나란 존재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 혼자 저절로 세상에 태어나 혼자 자라지 않았다. 누군가의 선택이, 누군가의 존재가 나를 이만큼 키웠던 것이다. 그들이 코뿔을 맞대고, 서로의 등을 내어주고, 다친 다리를 만져주었기 때문에, 사랑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
노든과 헤어지기 싫다는 아기 펭귄에게 노든은 말한다.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나를 혼자 보내지 말아요."
"이리 와, 안아줄게. 그리고 이야기를 해 줄게. 오늘 밤 내내 말이야. 오늘 밤은 길거든. 네 아빠들의 이야기를 해 줄게. 너는 파란 지평선을 찾아서, 바다를 찾아서, 친구들을 만나고, 우리 이야기를 전해 줘." (115 ~116쪽)
예전에 코끼리 고아원을 나가기 주저하던 노든에게 다른 코끼리가 말했다.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
노든은 이제 아기 펭귄에게 그 말을 돌려주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의 삶이 역경과 시련으로 점철되어 온통 고통뿐이었지만 그의 선택으로 누군가가 태어나 살아간다.
이 책의 모든 일은 노든이 '코뿔소'로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의 선택을 단순히 좋고 나쁜지 이분화해서 판단할 수 없다. 인생은 그만큼 복잡하게 얽혀있고, 나의 선택과 당신의 부탁이, 함께 보낸 수많은 긴긴밤이 작은 세상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보낸 그 긴긴밤 덕분에 노든은 펭귄 무리 속에서 아기 펭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으리란 것이다.
가끔 저는 저 자신만 생각합니다. 내가 아픈 것만 생각해서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하지만『긴긴밤』을 읽고 달리 생각했어요.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이만큼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부모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누군가의 존재가, 누군가의 선택이, 누군가의 지지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고 믿어요. 제 아이들도 이런 마음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혼자만 잘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누군가의 존재에 기대서 이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