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하루를 만들기
신입사원이 팀에 들어오면 1on1 미팅에서 빠지지 않던 주제가 있다. '시간 관리'이다. 그 고민을 들으며, 나는 늘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계획보다 '기록'이 먼저라고.
"금방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오래 걸리더라고요."
"처음 해보는 일이라 얼마나 걸릴지 감이 안 와요. 계획을 세워도 일이 자꾸 밀려요."
계획을 세워도 일을 끝내지 못한 이유는 단순하다. 구글 캘린더에 '10시-12시 보고서 작성'이라고 계획하는 건 쉽다. 하지만 정말 그 시간에 보고서를 썼는지, 아니면 자료 찾다가 끝났는지, 회의에 끌려갔는지, 본인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기록이 필요하다.
실제로 내가 그 일을 하는 데 얼마의 시간을 썼는지 알아야 다음 계획도 세울 수 있다. 2시간 안에 완성해야 할 보고서가 있다면, 30분 타이머를 맞추고 시작해 보자. 알람이 울릴 때까지 목차도 다 못 짰다면, 그건 2시간 안에 끝낼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실제로 쓴 시간을 기록하는 일은 현실을 알려준다. 가능성의 감각을 일깨워주고, 비로소 계획할 수 있게 한다. 나의 일과를 통제하고 있다는 자신감과 자기 효능감은 덤이다.
퇴사 한지 두 달. 내 아이를 내가 키우겠다는 선택은 단순하고 자연스럽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시간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다.
출근하기 싫은 날은 있어도, 은퇴하고 싶은 날은 없었다. 나는 '일'이 즐거웠다.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불씨가 사그라들 때 즈음 새로운 불티를 찾아 떠났다. 지금도 난 그 과정 어딘가에 있다.
아이패드 드로잉을 시작하고 보름 만에 스톡작가로 첫 수익이 생겼다. 귀여운 금액이지만 회사를 벗어나 처음 번 돈이었다. 툴도, 그림 그리는 법에도 서툴렀지만 밤마다 유튜브를 찾아가며 배웠다. 틈만 나면, 아니 틈을 만들어가며 종일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내가 월급을 더 늘리면, 자기가 살림만 하면서 지낼 수 있을까?"
"그게 목표라면 회사는 진작 그만뒀겠지?"
"취미는 그냥 취미로 해. 나 힘들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나는 그저 시간을 나답게 쓰고 싶었는데, 무엇을 놓쳤던 걸까? 밤새 공부하고 그리며 '1년만 이렇게 하면 괜찮은 수익 파이프 라인을 만들 수 있겠는 걸'하고 기대에 부푼 그때. 나는 일상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침마다 건네던 "잘 잤어?"라는 다정한 인사, 우리가 '극단적 껴안기'라 부르는 세 번의 포옹, 현관을 나설 때까지 이어지던 열 번의 뽀뽀와, 아들과 나란히 외치던 파이팅까지. 그 작은 행복들이 흐릿해져 있었다.
'나답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정작 나를 닮은 하루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매일의 흐트러짐 속에서 내 리듬을 잃고 있었다. 그래서 내 하루를 기록해 보기로 했다. 기록이 나를 다시 삶의 중심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지, 매일 실험해 보기로 했다.
아이 등원 준비, 집안일, 장보기, 식사, 하원 이후의 흐름까지. 나의 하루는 이미 육아와 살림이라는 '고정비'로 대부분 채워져 있었다. 그것을 원망하지 않고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은 ‘변동 시간’을 어떻게 써야 가장 나답게 살 수 있을지 매일 실험했다.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점심 먹고 오후 12시부터 3시까지, 그리고 밤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아이를 재운 직후는 가장 안정적인 때였지만, 몸은 이미 지쳐있었다. 반대로 새벽 4시에 일어나기도 했지만, 아이 역시 깨서 날 찾는 바람에 집중은커녕 더 피곤해졌다.
결국 무엇을 선택하든 ‘꾸준함’ 이 어려웠다. 하지만 매일의 기록을 살피면서 나는 내게 맞는 리듬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삶을 바꾸는 건 의지나 자극이 아니었다. 계획은 무너질 수도 있다. 하지만 기록은 쌓인다. 그 기록 덕분에 기대했다 좌절하고, 다시 조정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었다. 그렇게 진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많이, 빨리' 하겠다는 욕심을 버렸다. 하루 1시간 만이라도,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피곤한 날은 단 한 줄만 적거나, 그림 아이디어만 정리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좌충우돌한 날들이 어느새 한 달. 완벽하진 않아도, 나는 매일 나를 위해 시간을 쓰는 삶의 리듬을 되찾고 있다.
오늘도 하루 끝에 묻는다. “내 시간은 어디로 흘러갔지?” 그 답이 쌓이면, 나는 어느새 내가 바랐던 모습에 닿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