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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곰 Jun 25. 2023

04. 이제는 울지 마세요


피난길 돌아와 되찾은 보리 다섯 말
지독하니 길고 고되었던 가난과의 전쟁

처절하고 오랜 싸움과 투쟁의 대가로
평생을 자랑삼을 영광의 순간도 맞이했었다

모든 고난과 영예가
은은하게 물든 석양의 노을처럼

등뒤로 뉘이 지나가던 인생의 말년에
그는 자신만의 기호로
다음과 같이 적어내려 갔다

“이제는 울지 않으련다…
이제는 울지 않으련다…”

그의 바람대로 가족들 눈에서 눈물 말라갈 때
조용히 세상을 향한 마지막 눈물 그렁이며
나지막이 삶에 작별 인사를 건넸다

문상 손님 불편 말자는 가족들의
힘든 침묵 속에

희로애락 함께한 전우들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더욱 크고 힘 있게 울려 퍼진다

그가 떠나는 그날도, 그리고 다음날도
새벽종은 울렸고, 새 아침은 밝았다




‘이제는 울지 않으련다’

매일 아침 새벽 어머니 산소에 문안을 올리던 효자.

손주의 버릇을 고치고자 명심보감을 받아 쓰게 하던 교육자.

가난한 시골 마을을 잘 사는 동네로 거듭나고자 선도했던 계몽주의자.

동네를 돌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떠나간 한 사람.


내가 기억하는 외할아버지의 모습들이다.

할아버지의 떠나가는 마지막 길은 당시에도 흔치 않았던 마을장으로 치러졌다.


한평생을 살아온 송탄 칠원리.(현 평택 칠원동)

옛 칠원리는 인근 원균의 후예들이 모여 사는 원도일리 지주들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짓던, 이주 가난한 소작농들의 마을이었다.

그 가난이 끔찍하여 마을의 혼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인근 마을에 가서 관련 용품들을 빌려오고서야 비로소 백년가약을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바꾸고자 할 의지가 약하였던 어른들.

어린 외할아버지는 패배주의가 당연시 팽배하던 마을의 모습에 너무나도 화가 났었더란다.


그래서 또래들을 모아 소년단을 조직하여 악착같이 이삭을 주어 모아 보리 다섯 말을 만들어 냈다.

이 보리 다섯 말을 재산 삼아 큰일을 도모하고 싶었는데 그만 6.25가 터지면서 피난길에 오른다. 피난길에 오를 때도 그 다섯 말은 쓰지 않고 땅속에 묻어 두었다.

그리고 다시금 돌아온 고향에서 그 보리를 찾았을 때 너무나도 기뻤었다고 했다. 삶의 모든 희망이 그 다섯 말속에서 보였으리라.


전쟁 이후 그 소년단을 조직했던 그 마음가짐과 정신 그대로 ‘새마을 운동’에 본격적으로 앞장서면서 마을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나갔다.

이후 마을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발전하게 되고,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가 되며 외할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되며 이후에는 송탄 시의원을 지내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이제는 기억에서 가물해지는 외할아버지의 자서전 ‘이제는 울지 않으련다’를 보고 기억하는 장면들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 책을 읽고 내용을 숙지하고 있었기에 마을회관 장례식장에 등장한 머리 희끗한 노인분들이 대성통곡하시는 연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바람 잘날 없이 키운 6남매의 손님들과 마을 주민들의 끊이지 않는 발길 속에서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전우들의 울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제 남의 마을 손을 빌리지 않고서도 마을 예산으로 마려한 관 속에서 온 평생을 살아온 이생의 고향과 작별을 나누셨다.


햇살이 따사하던 날 운구 행렬은 마을은 한 바퀴 돌며 할아버지를 보내 드렸다. 나는 키가 크다는 이유로 맨 마지막열에서 운구를 도왔다.

마을 곳곳을 지나는데 특히 생존에 아끼셨던 장소를 지날 때면 종종 관이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발길이 무거워져 행렬이 느려지는 순간.


막내 외삼촌이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우리 아부지 아직 가고 싶지 않으신가 보네”


유학자도 울고 갈 유교보이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생명이 없고, 사연 없는 삶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 조부모 세대의 인생은 지금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세대가 쉽게 재단하기 어려운 고단함이 있었다.


유년기에 전쟁이라는 참상을 겪고 살아남고자 했던 그들의 삶의 모습들을 이미 우리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어린 시절 반창 투정이라도 할라 치면, ‘전쟁통에는 이런 거 구경도 못했어!’라고 핀잔주던 어른들.

홀몸으로 키우던 중학생 아들의 엇나감이 감당하기 어려웠던 어머니가 어린 나를 외가댁으로 유배 보냈을 때에도, 외할아버지는 혼내시기보다 앞으로 10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방 안에서 명심보감을 쓰라고 말씀하셨다.


인의예지 효제충신 (仁義禮智 孝悌忠信)

매일 받아 쓰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허탈해했던 유배의 나날들. 도대체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중2병에 잔뜩 걸려 화가 난 내 모습이 기억난다.


이제 그 잔뜩 열이난 중2 아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 세대들도 이미 우리 삶과 사회 속에서 사라졌거나 너무 옅어져 버렸다.


남아 있지 않거나, 남아도 이제는 목소리를 잃었거나.


지금 꼰대들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어마 무시한 그들의 핀잔과 훈육의 메시지 속에는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물들어 있었다.


고려 시대에 불교가, 조선시대에 유교가 있었던 것처럼 그들에게는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통념과 기준점이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사라져 버린 지금 우리 사회는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워가고 있는가 생각이 든다.


모두의 목소리와 개성을 존중하다 보니 그 누구의 얘기도 오히려 크게 중요하지 않아 진 사회.

다름에 관대하지만 중요하게는 여기지 않는 사회상


나 역시 그에 쉽게 물들어 살아가고 있지만,

문득 오늘 같은 날에는 그들의 삶과 가치관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들이 떠나가도

새벽종은 울렸고, 새 아침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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