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 맛에 살거든요
며칠 전부터 작업실 짝꿍이 저를 꼬시고 있었어요.
그림책 학교의 마지막 전시가 이제 곧 4월에 있거든요. 그래서 3월은 같이 한 번 불태워 보자고요. 무려 저녁 8시까지 함께 작업하자는 제안을 해줬어요. 불타오르는 짝꿍 옆에서 불쏘시개 역할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살살 올라왔습니다. 무리 같기도 했지만, 1 달이라는 이야기에 솔깃하기도 했고요. 음. 어디 한 번 오늘 저녁부터 시작해볼까 싶었는데, 몸이 먼저 반응하면서 거부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집에 가서 뒷동산 산책을 나갑니다.
저는 마음이 힘들 때면 걷거든요.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걷기는 발로 하는 기도라고요. 특별히 믿는 분은 없지만 살다 보면 고요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은 날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걷기만 한 게 또 있을까요. 걷다 보니 지금까지 나의 삶이 떠오릅니다. 생각해 보니 전공했던 건축을 떠나온 것도, 좋아하던 회사를 정리한 것도, 어쩌면 이 저녁 시간을 사수하기 위한 일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 곰민정이라는 사람에게 저녁이란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던 것 같아요. 괜히 알아주지 못한 그 마음이 미안해집니다.
참새 방앗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천시장에 들러요.
생활필수품(?) 대파도 한 단 사고, 두툼한 베이컨도 하나, 제철을 맞은 알배기 배추도 한 포기, 우리 짝꿍이 제일 좋아하는 곤약도 한 봉지,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쪼매난 귤도 한 봉다리 삽니다. 마감 세일로 귤 한봉다리 2,900원 주고 샀는데 뭐야, 이번 귤시즌에 먹은 귤 중에 제일 맛있습니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운 음표가 됩니다. 그러고 보니 집, 산책, 요리는 저에게 늘 큰 기쁨이에요. 집은 내가 온전히 쉴 수 있는 곳이고요, 산책은 닫힌 내 마음의 공기를 싱싱한 빨빨 새 공기로 바꿔주는 것이고, 요리는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설렘입니다. 그리고 작두콩차를 마시며 집과 산책, 요리가 빚어내는 이야기를 살살살 풀어내는 지금도 제가 참 좋아하는 시간이에요.
내일은 오랜만에 배추전을 구워봐야겠어요.
요즘 배추가 얼마나 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