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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민정 Oct 01. 2023

눈사람은 눈사람

어쩌다 눈사람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더라?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그림책 학교에 갔다. 

그림책 학교에서 1년, 나에 대하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1. 푸른색이 좋다. 

중학교 때는 노란색에 꽂혀 있었다. 회사에 다닐 때는 초록색(브라키오사우르스)을 좋아했다. 이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어떤 색으로 그림을 그린다? 너무 단순한 사실이지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내가 그린 그림을 가장 오래 보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사실이다. 종이 위에 푸른 선을 그을 때, 내 마음이 탁 트이면서 속이 시원해졌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파란 그림들을 그리게 된 것은. 


2. 한지가 좋다. 

뭐 워낙 그림에 대해 잘 아는 게 없다 보니 어떤 종이에 어떤 재료로 그려야 할지 잘 몰랐다. 이것저것 써보다가 우연히 화방에서 한지를 몇 장 사서 그려봤는데 오마나? 그냥 종이에 그림을 그릴 때 양말 신고 운동화 신은 기분이었다면, 한지에 그림을 그릴 땐 샌들을 신고 도로를 활개 치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선생님이 한지는 정말 다루기 어려운 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그냥 썼다!


3. 맥락이 좋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꼭 한 장이 아니라 연작/시리즈를 그리게 되더라. 그 여러 장의 맥락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생긴다. 어쩌면 나에게 소중한 건, 한 장 한 장의 그림보다 그 맥락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았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볼 차례. 

소재는 무엇이든 상관없었는데, 때마침 겨울이었고, 또 때마침 푸르스름했던 눈사람을 골라봤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눈사람은 푸른색이 아니다...ㅋㅋㅋ) 어떤 이야기를 할까, 하다 그 당시 최고의 고민이었던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회사를 다닐 때 씩씩하게 꿈을 꾸던 마음이, 회사를 그만두고(다르게 말해 월급이 끊기고) 작업을 시작하면서 순살 아파트마냥 자주 물렁거렸다. 돈 앞에서 자꾸 작아지고, 친구들을 만날 때도 밥을 사기는커녕 더치를 해도 부담스러운 순간들이 자주 생겼다. 너무나 근사한 내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노력해 나의 부담을 줄여주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그 배려들이 참 힘들었다. 자꾸만 빚지는 느낌이 들었고, 언제 갚을지 묘연하다는 마음이 자주 나를 짓눌렀고, 만나서 반가운 마음보다 나를 배려해 주느라 애쓰는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자꾸만 더 커졌다. 


그래서 동글동글 뭉쳐 커다래진 눈사람, 그리고 봄이 와서 녹아내리는 눈사람을 가지고 자존감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내 마음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림책은 나에게 부적이었고, 부적을 쓰기 위해서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그때도 지금도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뾰족한 해결책(물론 근력운동을 하는 것, 밥을 잘 챙겨 먹고 잠을 잘 자는 것, 작게나마 돈을 버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을 찾지 못했으므로 그 이야기는 아직 내가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


그래서 눈사람만 남고 자존감은 날아가버렸다. 

눈사람으로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한다? 

(새삼 글을 쓰다보니... 나는 진짜 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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