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고있는 지금도,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도, 그때가 언제든 발라드는 늘 음원차트 10위권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2025년 1월 초 시점의 멜론 TOP100 차트, 1990~2023년도 시대별 차트 기준) 발라드는 대중에게 언제나 사랑받는 올 타임 스테디셀러이자 대표적인 국내 주류 음악 장르이다. 하지만 차트에서 발라드가 차지하는 비율에 비해, 각 곡들마다의 개성은 이상하리만치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2025년 1월 초 멜론 발라드 차트 100위권 기준) 차트에 이름을 올린 발라드 곡들은 꾸준히 사랑받는 구보, 드라마/영화 OST, 유명 원곡을 리메이크한 곡이 대다수이다. 이를 제외한 신곡들마저도 대부분이 소위 양산형 발라드라고 불리는 곡들이다. 처음 들어도 이미 들어본 듯한 머니 코드 진행과 하이라이트의 고음 차력쇼, 늘 이별하고 술과 함께 떠나간 상대를 그리는 처절한 가사로 점철된 이러한 곡들은 2017년도부터 쏟아지며 차트를 휩쓸었고,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순순희 '슬픈 초대장', 황인욱 '플러팅'과 같은 곡들이 차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문제는 앞서 말한 예시들에서 벗어난 좋은 신보들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2024년에 발매된 발라드 곡 중에 유의미한 성적을 거둔 곡을 대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앨범'을 대는 것도 그러한가? 다른 아티스트들과는 차별되는 본인만의 정체성을 잘 보여줬다고 할 만한 앨범은 과연 얼마나 있었나? 성적과 정체성 두 가지를 모두 잡았던 과거의 앨범, 아티스트들과 비교하면 현 발라드 시장의 문제점은 더욱 극명히 보인다.
이소라의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선, 허스키 보이스를 얼터너티브 락을 섞어 그만의 감성을 확실히 보여준 [눈썹달]은 '바람이 분다', '이제 그만'이라는 히트곡을 배출해냄과 동시에 6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재즈, 포크, 뉴웨이브 등 다양한 장르를 접목시켜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낸 토이는 수록곡에 참여한 객원보컬까지 화제가 되며 성공하지 않은 앨범을 고르는 것이 더 어렵다. 적극적인 스트링 활용과 진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보컬 운용으로 특유의 사근사근한 음색에 힘을 더해주는 성시경의 특징 또한 모두가 알듯이 [The Ballads], [다시 꿈꾸고 싶다]와 같은 앨범에 잘 담겨있다. 그리고 당시 발라드 앨범들의 음악성은 대중을 넘어 전문가들의 인정까지 놓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이소라, 토이, 성시경의 앨범은 모두 100BEAT와 같은 권위 있던 웹진이나 멜론이 선정한 명반 리스트에 올랐으며, 당시의 한국대중음악상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라드 앨범을 찾아볼 수 있었다. (2008년에는 이적의 [나무로 만든 노래]가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되었고, 그 뒤로도 2009년 김동률의 [Monologue], 2010년 이소라의 [7집]이 동일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그렇다면 왜 최근에는 모두에게 인정받는, 퀄리티 높은 앨범이나 정체성이 확고히 드러나는 아티스트를 찾기가 어려운 것일까.
우선적으로 보컬리스트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축소로 인해 신인 발굴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슈퍼스타K', 'K팝 스타', '위대한 탄생' 등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신인 발라드 아티스트의 등용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는 인기가 많이 식어 방영하는 프로그램의 수가 크게 줄었고, 그나마 최근에 화제가 되었던 '싱어게인' 마저도 상위권 참가자들의 주 장르는 발라드가 아닌 락, 포크이다.
이는 타 장르의 영향력이 강해진 현 음악시장 추세와도 연결된다. 몇 년 전 대두되기 시작한 '락 붐'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DAY6, QWER, LUCY 등의 밴드들이 음원차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고, 실리카겔을 필두로 인디밴드 씬은 더없이 성장하고 있으며, 락 페스티벌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티켓을 팔고 있다. 또한 R&B는 K-POP과 함께 해외에서 크게 주목받으며 시장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고 수민, 유라와 같은 음악성을 인정받은 아티스트들이 장르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높은 퀄리티의 장르 음악이 접하기 쉬워지기까지 했으니, 정체된 발라드는 대체되기 십상인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발라드 아티스트의 실력을 평가하는 척도가 가창력이 되었다. 음원차트에서 보이는 발라드 곡들을 동일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노래방 차트이다. 00년대에는 박효신, 민경훈, SG워너비처럼 아티스트 특유의 창법을 살려 모창하기 좋거나 따라 부르기 좋은 미디엄 템포 발라드들이 주로 불렸다면, 14~16년도 이후로는 코인노래방 붐과 함께 '일반인들의 소름 돋는 라이브' 같이 SNS를 통해 일반인 고수들을 접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가창력을 과시하기 위한 양산형 발라드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하이라이트에서 고음을 지르는 곡은 점점 늘어나 더 높고 더 어려운 고음이 곧 경쟁력이 되었고, 이는 제작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제한점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점점 더 짧아지는 러닝타임과 트랙 단위의 스트리밍이 증가하는 음악시장 전체의 추세로 인해 완성도 높은 앨범을 발매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으며, 발라드의 수익 구조 또한 앨범 제작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적, 김동률, 성시경, 하동균 등 90~00년대부터 활동한 아티스트들부터 박혜원, 한동근, 로이킴 등 10~20년대에 데뷔한 아티스트들까지, 모두 작년에 싱글 외의 앨범을 발매하지 않았다. 유입과 유출이 수시로 발생하는 팬층을 타겟팅하며 음반 수익이 주 수입원 중 하나인 아이돌에 비해, 대중을 타겟으로 하고 음원과 공연이 주 수입원인 발라드 아티스트들은 앨범을 제작하는 데 있어 비교적 더 많은 부담이 들 수 있다. 굿즈 수익과 같은 부가적인 수입원이 없다는 것 또한 앨범에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는 이유로 예상된다. 하지만 하나의 스토리나 주제를 통해 유기적으로 묶어 더욱 몰입하게 하거나, 다양한 분위기와 여러 음악적 시도를 담아 풍부한 경험을 가능케하는 앨범에 비해 싱글에서는 훨씬 단편적인 감상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주목할 만한 발라드 '앨범'과 아티스트 각각의 개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 발라드 시장이 발라드라는 장르의 퇴보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중에게 친숙한 주류 음악이라 해도 결국 장르적인 발전을 이룩할 '명반'이 없다면 리스너의 유출은 물론이고, 어쩌면 다른 장르에게 '주류' 딱지를 내어줘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여전히 음원차트 속 발라드의 비중은 낮지 않으며 최근 1~2년간 발매된 신보 중에도 주목할 만한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박재정의 [1집 Alone]은 '헤어지자 말해요'라는 히트곡을 배출해 낸 것에 더해 담백한 보컬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섬세한 재즈 편곡으로 10년 만의 첫 정규앨범이라는 부담을 완전히 벗어냈다. 박원의 [my fuxxxxx romance]는 욕설과 '죽여버렸어', '더럽대' 등의 다소 과격한 단어들과 으스스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편곡을 통해 극한의 우울에 몰입하게 했다. 새로운 시도는 아니었지만, 특유의 따뜻한 감성과 비장미를 적절히 섞어낸 정준일의 [어떤 무엇도 아닌]과 같은 앨범들은 발라드 신보 가뭄 속에서 소중한 오아시스가 되어주었다.
이 앨범들처럼 완성도 높은 발라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타 장르를 차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예시로 김동률은 멕시코의 볼레로 장르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따뜻하고 웅장한 스트링과, 보사노바의 편안한 사운드 등 월드 뮤직 속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이는 김동률만의 개성으로 굳어졌다. 윤상 역시 특유의 마이너한 멜로디에 전자음악을 접목시켜 [CLICHÉ]라는 명반을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시도들이 계속해서 늘어난다면 하위 장르의 파생으로 이어져 장르 자체의 확장이 가능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현시점을 발라드의 '몰락'이라고 단언하지는 않겠다. 과거에 비해 화제성과 퀄리티가 떨어졌다 해도 어쨌든 아직까지는 발라드가 주류 장르이며 발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리메이크, 양산형 발라드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와 함께 본인만의 정체성을 살리는 앨범들이 늘어난다면, 발라드 황금기는 어렵지 않게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