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KUNELAMA, 놀이도감, 최성 외
실버레드 : 전작 [LUCHADOR]에서 R&B를 기반으로 보사노바, 브라질리언 펑크 등 다양한 장르를 결합했던 전략을 이번 싱글 ‘Hit the Bang (feat. SUMIN)’에서도 이어갔다. 다만 이번에는 R&B에 마이애미 베이스를 접목하며, 사운드를 세밀하게 구성하고 층층이 쌓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리드미컬한 퍼커션과 붕붕거리는 빈티지 서브베이스, 과도한 딜레이가 서로 레이어처럼 겹치면서 곡 전반에 레트로하고 몽환적인 무드를 형성한다. 여기에 수민 특유의 유연한 보컬 변주가 더해져, 단조로울 수 있는 구조에 자연스러운 변화를 주고 곡 전체의 세련된 분위기를 완성한다. 이러한 사운드 구성 덕분에, 곡은 보컬이 주도하기보다 사운드 위에 자연스럽게 얹히며, 전체적인 질감과 구조에서 오는 세련된 '트랙'의 매력을 보여준다.
라쿠네라마는 데뷔 이후 단기간에 한대음 주요 3개 부문 노미네이트라는 쾌거를 이룬 R&B 듀오로, R&B 장르에 다양한 정서를 녹여내며 자신들만의 감각을 구축해 왔다. 그들은 단순히 장르를 결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적 로컬라이징과 빈티지한 질감을 더해 특유의 무드를 만들어왔는데, 이번 싱글에서도 그 감각을 유지하면서, 수민의 결에 가까운 콘템포러리 R&B와 유연하게 밀고 당기는 리듬을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을 취했다. 이는 두 아티스트의 색채를 자연스럽게 교차시키면서, 자칫 자가복제로 이어질 수 있는 기존 사운드의 반복을 비껴가는 영리한 선택으로 읽힌다. 결국 이번 싱글은 라쿠네라마가 구축해 온 음악적 세계를 한층 확장하며, 이전과는 또 다른 세련된 무드를 보여주는 곡이다.
태휘 : 놀이도감은 실리카겔의 실험성과는 결이 다른, 김춘추 개인의 음악적 스타일을 투영한 솔로 프로젝트이다. 이번 앨범에서 기존 디스코그래피와 달리 클래식 연주자를 비롯해 mei ehara와 협업하며 그가 추구하는 포크 감성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증명했다. 첫 번째 트랙의 ‘Today Today’는 바이올린과 첼로가 실시간으로 합을 맞추며 들어가는 도입부를 통해 연주자 간의 호흡을 중시하는 연출을 통해 기계적인 완결성보다 김춘추만의 어쿠스틱 문법을 잘 보여준다. 이후 기타와 드럼 사이 포근히 감싸진 놀이도감이 등장하며, 마치 곁에서 속삭이는 듯한 친밀감을 느끼게 해 준다. 연이어 등장하는 ‘TRUTHBUSTER’는 각자의 위치에 깔끔히 배치되어 진행되는 가벼운 사운드 속에서 색소폰의 등장으로 이 모든 소리들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안정감을 준다. 특히 이번 앨범의 묘미는 두 곡에 걸쳐 삽입된 인스트루멘탈 트랙이다. ‘Soy Milk’에서는 부드럽고 묵직한 기타 사운드 속 정반대되는 플룻 사운드가 등장해 고급스러운 사운드를 완성하고, ‘Village des Chiens Bleus’에서는 간질거리는 전자 사운드 위로 따뜻한 클라리넷이 더해져 여유롭게 거닐고 싶은 느낌을 준다.
흥미로운 점은 이토록 따뜻하고 생생한 사운드 이면에 관계 속 파괴적인 감정이나, 공격적이고 쓸쓸한 현실을 담아낸 가사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사운드와 메시지 사이의 극명한 대비는 자칫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오히려 의도된 괴리야말로 미화 없는 진실을 마주하게 만드는 놀이도감만의 방식으로 느껴진다. 결론적으로 이번 정규 2집 [TRUTHBUSTER]는 '놀이도감'이라는 이름 아래 시작된 김춘추만의 놀이 방식이 한층 더 정교해지고 단단해진 결과물이다. 자신이 이어오던 포크, 사이키델릭 음악에 관현악을 더하여 과하게 꾸며내지 않은 소리를 완성했고 여기에 날카로운 진실이 맞물린 가사를 더한 이번 앨범은 오묘한 몰입감을 통해 그만의 음악 세계관에 설득당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는 단순히 정규 앨범이라는 형식을 넘어서 김춘추만의 음악적 외연을 확장하여 아티스트로서의 성장을 증명할 수 있었던 기록이다.
Mila : 하이퍼팝은 더 이상 '하잎'하지 않다. 장르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 대중에게 안겨주었던 과잉된 사운드의 충격은 이제 더는 신선한 무기로 작동하지 않는다. 많은 아티스트들 역시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간 넓은 장르 스펙트럼을 증명해 온 최성이 뒤늦게 하이퍼팝 노선을 택한 모습은 사뭇 의아하다. 실제 트랙들이 취한 작법은 이러한 의문을 가중시킬 뿐이다. ‘랩틸리언’과 ‘mcintosh’에서는 의도적으로 박자를 무시하고 랩을 뱉어내지만, 이는 변칙적인 멋으로 다가오기보다 도리어 아티스트의 의도를 묻게 만드는 난해함으로 남는다. ‘Eclipse’ 역시 기시감이 드는 전형적인 하이퍼팝의 문법을 답습할 뿐이며, ‘멸종위기’와 ‘fuck a world’의 노골적이고 저속한 가사는 당혹스러움만을 남긴다. 그나마 후반부의 ‘black’, ‘비네’에 이르러서야 앞선 트랙들과 대비되는 최성 특유의 멜로디컬한 매력이 짧게 스쳐 지나갈 뿐이다. 앨범 전반을 지배하는 웅얼거리는 발음과 이모 랩 가사, 과도한 오토튠의 질감은 멘헤라의 정점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르 선택에 대한 의구심을 해결하지 못한다.
David Bowie의 [Blackstar]를 연상시키는 앨범 커버 또한 그 의도를 납득하기 어렵다. 별을 뒤집어 놓은 이번 앨범의 커버는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 [Blackstar]와 완벽한 대척점에 서서 극단의 가벼움을 보여주겠다는 선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대중음악사에 굵은 획을 그은 David Bowie의 유작을 이런 방식으로 차용해야만 했는지는 묻지 않을 수 없다. [Blackstar]의 무게감을 빌려온 커버와 천박할 정도로 가벼운 텍스트들의 충돌은 기묘한 괴리감을 넘어 일종의 거부감마저 불러일으킨다. 하이퍼팝의 극초기에 A.G. Cook이나 SOPHIE 같은 아티스트들은 과잉된 사운드를 통해 기존 팝이 담지 못한 정체성과 감각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장르가 유행하면서 초기 하이퍼팝이 품었던 메시지는 소진되었고, 오직 자극적인 사운드의 껍데기만 남은 양산형 음악들이 쏟아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최성의 [black.] 역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집어 든 것은 이미 의미가 휘발된 장르의 빈 껍데기였으며, 그 속에서 장르도, 가사도, 커버도 청자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Mila : 2024년 NPR Tiny Desk 콘서트 하나로 단숨에 주목받게 된 아르헨티나 듀오에게, 성공이란 것은 꽤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미와 다섯 개의 라틴 그래미를 쓸어 담은 뒤 찾아온 영광은 번아웃을 함께 데려왔고, 웰니스 센터를 콘셉트로 한 앨범 [FREE SPIRITS] 이러한 성공의 이면을 가사의 주된 배경으로 삼는다. ‘Nada Nuevo’에서 자신은 Lady Gaga가 아니라고 말하며 유명세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내고, ‘No Me Sirve Más’에서는 가질수록 기분이 나빠진다고 중얼거리며, ‘Vida Loca’에서마저 "유명해지는 건 끔찍하다"며 탄식한다. 동시에 이들의 실험은 장르의 형태로 터져 나오는데, 만트라풍 오프닝부터 디스코 요소가 가미된 ‘Muero’, 록 장르의 ‘Hasta Jesús Tuvo Un Mal Día’, 80년대풍 팝으로 시작해 댄서블하게 비트 스위치 되는 ‘Ha Ha’ 등 트랙마다 전혀 다른 세계를 펼쳐놓는다.
이 12트랙을 한 덩어리로 놓고 보면, 앨범은 분명 들쑥날쑥하다. 트랙이 바뀔 때마다 앞 곡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전혀 다른 장르가 들이닥치는 탓에, 개별 트랙의 매력과는 별개로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은 다소 끊기는 인상을 준다. [PAPOTA]의 단 4트랙이 보여줬던 서사적 밀도와 비교하면 아쉬운 지점이다. 그러나 그 산만함을 결함으로만 읽기엔 아깝다. 애초에 이 앨범의 전제 자체가 '우리는 지금 좀 혼란스럽다'라는 것이지 않나. 갑작스러운 명성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담았다고 보면, 오히려 이 어지러움이 정직하게 다가온다. 매끈한 완성도보다 거칠더라도 솔직함을 택한, 자유로운 영혼들의 가장 생생한 생존기 아닐까.
태휘 : 2026 MOBO Awards에서 '올해의 앨범', '최우수 여성 아티스트', '최우수 알앤비 아티스트' 등 3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현세대 알앤비 걸그룹의 아이콘이 된 FLO. 커리어의 정점을 찍어가고 있는 그녀들이 신보 ‘Leak It’을 통해 변곡점을 제시했다. 기존에 제시하던 정통 알앤비 속 그루비한 코드 워크 대신 이번 싱글에선 윈드 신스의 변칙적인 질감을 활용한 단순한 리프 구조가 특징이다. 특히 곡 전반의 끈적한 멜로디와 화려한 보컬 기교를 과감히 배제하는 대신, 직관적이고 단조로운 리프성 탑라인을 배치해 대중적인 중독성을 끌어올린 점이 눈에 띈다. 알앤비보다는 팝에 가까운 장르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변화된 프로듀서 진의 역할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기존에는 다양한 알앤비 아티스트와 협업한 프로듀서들과 작업을 이어왔다면, 이번에는 Sabrina Carpentar의 앨범에 다수 참여한 팝 프로듀서 Julian Bunetta, Steph Jones와 함께했고, 이러한 이유로 오히려 The Pussycat Dolls를 연상케 하는 팝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곡 후반부에 터져 나오는 FLO의 전매특허 애드리브는 이들이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면서도 장르적 뿌리는 결코 놓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덕분에 과감한 변화 속에서도 완전히 낯설지 않은, FLO 특유의 정체성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번 싱글은 90년대 알앤비 사운드의 재현이라는 찬사 뒤에 가려져 있던 모방이라는 피로감을 영리하게 피한 결과물이다. 자칫 과거의 향수에만 기댄 레트로 그룹으로 치부될 뻔한 브랜딩의 한계를 깨부수고, 새로운 브랜딩을 제시한 것이다. 어떤 형식의 음악 안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강단 있게 끌어올릴 수 있음을 입증하며 FLO라는 브랜드의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이러한 이유로 알앤비 마니아층에 갇히기보다 대중적인 리스너들까지 포섭할 수 있는 강력한 접점을 만들어냈고, 어쩌면 향후 FLO가 어떠한 색다른 과정을 보여주더라도 FLO만의 스타일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뢰를 얻은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번 앨범은 대중적인 접근을 통해 리스너들의 시선을 다시금 집중시키는 동시에, FLO 커리어의 제2막을 밀어붙이는 가속 페달로서 충분한 역할을 했다.
실버레드 : 대중성을 겨냥한 신보 [U]는, 전작 [Wallsocket]의 실험적이고 과장된 사운드를 정리하면서 복잡한 전자음악의 요소를 팝 구조 안에 안정적으로 안착시킨 앨범이다. 브랜디, 브리트니 스피어스,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만큼, 이번 앨범은 귀에 꽂히는 멜로디와 반복되는 훅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전형적인 팝 구조를 띤다. 특히 ‘Do It’은 브리트니의 [Blackout]를 떠올리게 하는 2000년대 일렉트로 팝 스타일로, 2세대 K-pop f(x)의 ‘Electric Shock’에서 보였던 다채롭고 화려한 사운드 질감까지 겹쳐 보인다. 이러한 감성은 평소 K-pop에 관심을 보였던 아티스트의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리뿐 아니라 흐름에도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Tell Me (U Want It)’, ‘Music’ 등에서는 다음 트랙으로 이어지기 위한 트랜지션 사운드를 배치하며, 앨범 단위의 연결성을 의도한다. 일부 전환은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러한 구성은 앨범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데 기여하고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준다.
하이퍼팝과 일렉트로닉 팝을 기반으로 출발한 언더스코어스는, 장르를 섞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운드를 어떻게 쌓고 무너뜨릴지를 집요하게 고민해 온 아티스트다. 복잡한 사운드 레이어링과 자가 프로덕션을 통해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여 씬에서 가장 실험적이면서도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한 만큼, 이번 앨범은 그동안의 작업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 결과물로까지 완성했는가를 보여준다. 이에 대한 언더스코어스의 해법은 팝 장르와의 융합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한 것이며, 이를 통해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에서 머물지 않고 메인스트림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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