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기획 Mar 11. 2022

사람들이 이렇게 다양하게 산다는 걸 아는 게 재밌어요

느타리버섯 재배 농부 신윤호, 신윤경 님 인터뷰

의심스러워 보이는 그 길이 맞아요. 그리로 들어오시면 돼요.” 신윤호, 신윤경 님을 만나러 자택을 찾은 건 늦은 저녁이었다. 어두운 길에서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멈추었고, 어디에도 집은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전화를 걸어 위치를 물었을 때 윤호 님이 한 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자꾸 저 문장이 떠올랐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은 정확하고 자세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찾아갔지만 길 한가운데 멈췄다. 그런데 “의심스럽지만 맞는” 길로 찾아 들어갔고, 따뜻한 불이 밝힌 예쁜 집과 손전등으로 불을 밝혀주는 집주인을 만났다. 서울에서 안정적인 일을 하고 있었고, 어린 자녀가 있었고, 삼십 대 중반 젊은 나이였던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귀촌, 그것도 귀농을 고민하고 결정했다. 늘 소비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생산자가 되고 싶었던 윤경 님과 들이는 노력만큼 그대로의 결과를 보여주는 농업의 정직함이 좋은 윤호 님은 양양에서 느타리버섯을 키우며 또 한 명의 아이를 낳아 4인 가족이 되었다. 살면서 어떤 결정을 할 때 100% 확신을 갖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결국 여정을 완성하는 건 길을 나서는 용기, 어려운 선택 앞에 섰을 때 나를 믿고 한 발을 더 내딛는 용기일 때가 많다. 윤호, 윤경 님의 이야기는 그런 용기의 힘을 다시 한번 긍정하게 했다. 


윤호 님의 이야기 중 느타리버섯 재배를 선택한 이유에 ‘trial error’를 빨리, 많이 확인하기 위한 것도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도전하고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실수를 찾고 다시 또 도전하는 것. 넘어져서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기에 결코 쉽지 않았겠지만, 과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농업과 시골살이의 즐거움, 어려움을 들려준 두 사람의 표정은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작은 용기의 싹을 틔워줄 만큼 밝았다.  



양양군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두 분 이야기를 봤어요. 윤호 님은 전자회사 연구원이었고 윤경 님은 언론사에서 마케팅 일을 하시다가 귀농하셨다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나요?

신윤호: 저는 LG전자에서 일했어요. 학부 전공은 전자공학이었고 석사는 심리학을 전공해서 UX, 사용자 편의 등을 연구하는 직군에서 일을 했어요. 회사 생활은 한 4~5년 정도 했네요. 

신윤경: 저는 간호사였어요. 병원에서 근무를 했고, 이후 <헬스조선>이라는 매체에서 대한의사협회와 함께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하는 파트에서 일했어요. 


윤경 님은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로 일하다가 양양으로 오신 거죠?

신윤경: 제가 출산하면서 회사를 그만뒀어요. 그리고 첫째 아이가 네 살 때 양양으로 왔으니까 한 3~4년 정도 전업주부였죠.


두 분이 양양에 온 건 언제인가요? 

신윤호: 2017년 3월에 이사를 왔어요. 처음에는 읍내에 있는 아파트를 임대해서 왔고 땅 알아보고 집 짓고 주택으로 이사 온 건 2018년 여름이었어요. 그때 제 나이가 34살이었어요. 

신윤경: 저는 36살이었어요. 


2017년이면 양양이 지금처럼 주목받는 곳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여기로 오셨어요? 시골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였는지 양양에 가겠다고 정해둔 게 먼저였는지 궁금해요.

신윤경: 시골에 가겠다는 마음이 먼저였어요.

신윤호: 당시 둘 다 겪고 있는 고충은 달랐지만 시기적으로 맞아서 올 수 있었어요. 저는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되게 많이 받고 있을 때였어요. 큰 아이가 태어나서 점점 커가는데 함께 시간을 못 보내니까 일에 대한 회의감도 들고, 무엇보다도 회사 생활을 하면서 선배들을 보면 내 미래가 대충 가늠이 되잖아요. 그들의 모습을 보면 기대가 되기보다 걱정이 되고 결국 나도 이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이후에 훨씬 긴 인생을 살아야 할 텐데 그때 가서 대비하기에는 조금 늦을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이 있었어요.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을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가족과 같이 지내면서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가급적이면 사람한테서 오는 스트레스가 좀 적은 일이면 좋겠다 싶었고요.


윤경 님은 어떤 고민을 안고 있었나요?

신윤경: 저는 병원에서 일을 했으니까 건강에 관심이 많았는데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한국에서 미세먼지 이슈가 대두했거든요. 그래서 아기를 낳고 계속 집에만 있었어요. 공기가 너무 안 좋으니까요. 그게 너무 답답했어요. 또 저희가 살던 곳이 양재동이었는데 교육열 높은 주변 엄마들 얘기만 들어도 너무 스트레스인 거예요. 이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내가 아무리 확고한 교육관이 있더라도 옆에서 계속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자꾸 흔들리는 거예요. ‘이 환경을 벗어나고 싶다, 깨끗한 곳에서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신윤호: 마음이 그렇게 부풀어 오르던 즈음에 마침 저희가 가입한 한살림 협동조합에서 충청북도 괴산에 공동체 마을을 구성하니까 사람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어요. 되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을 했고 지원을 해서 선발이 됐어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처음 시작이라 준비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드는 거예요. 많은 사람이 공동으로 목표를 세우다 보니까 마찰도 많고 회의를 정기적으로 하는데 답은 안 나오고. 저희는 점점 지쳐가고 시간은 시간대로 흘러가고. 이대로는 우리가 생각했던 방식이 아닌 것 같아서 따로 준비를 해보려고 그 모임에서는 빠졌어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까 별생각 없이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양양에 온 거죠. 그런데 저희가 한 번 준비를 했기 때문에 지방에 가도 예전이랑 보는 시각이 조금 다른 거예요. 


이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 여행에서 양양의 매력을 느끼신 거군요.

신윤호: 네. 괴산은 대도시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 저희는 아이가 있으니까 병원이 가까워야 하잖아요. 처음 정착하려고 한 마을은 소아과에 가려면 차로 두세 시간 가야 했거든요. 그런데 양양은 속초나 강릉이 가까우니까 도시 접근성이 좋으면서 양양 자체는 시골이잖아요. 그리고 괴산의 그 마을은 정말 어르신밖에 안 계셨어요. 저희가 같이 마을에 들어가려고 준비했던 분들도 나이가 많으셨고요.


대부분 은퇴 세대 귀촌이었군요.

신윤호: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는데 양양에 와서 보니까 시골이라고 다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당시 제 친구들이 여기 와서 서핑을 하네 마네 하면서 조금씩 왔다 갔다 하던 시기였어요. 서핑하러 양양에 가는 사람이 많으면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좀 많이 오지 않을까 싶었죠. 인근에 큰 도시도 있고 서울까지 교통도 나쁜 편이 아니고요. 무엇보다 산도 있고 강도 있고 바다도 있고 이 풍경이 너무 좋았어요. 



두 분 모두 양양이 고향도 아니고 연고는 전혀 없으셨던 거죠?

신윤호: 네, 전혀 없어요. 고향은 서울이에요. 

신윤경: 저는 강원도 원주가 고향이에요.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고민을 하셨지만 먼저 말을 꺼내거나 좀 더 주도적으로 상황을 이끌어간 사람은 누구였나요? 

신윤경: 처음에는 남편이 먼저 얘기를 했어요. 그때는 이렇게 시골까지는 생각을 안 했고 경기도 광주나 안양, 용인 이쪽으로 몇 번 집을 보러 가기도 했어요. 당시에 저희가 아파트에 살았는데 아랫집과 층간소음 갈등도 있었어요. 그래서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죠. 그런 생각으로 집을 보러 다니다가 한살림 공고를 본 거예요. 


마음을 먹고 실제로 양양에 온 시점까지 준비 기간은 얼마나 걸렸나요?

신윤호: 한 1년 반 정도.


그 기간 동안 주로 어떤 지역으로 이주해서 살 지를 중심으로 고민하셨을 텐데 일에 있어서도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하셨어요? 젊은 사람이 귀촌할 때는 농사가 일자리의 1순위는 아닐 수 있잖아요.

신윤호: 저는 1순위가 농사였어요. 아까 얘기했듯이 집에서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시골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시골에서 집에서 일하는 건 농사지. 시골이면 역시 농사를 지어야지.’라고 생각했어요. 딱히 거부감도 없었고 당연히 시골에 가면 농사를 지어야겠구나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신윤경: 저도 막연하게 생산자가 되고 싶었어요. 서울에서는 소비자로서만 생활을 했으니까 직접 생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딱 떠오르는 게 농사였어요. 그리고 저희가 양양에 왔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관광객이 많지 않았어요. 농사 아니면 일반 직장 생활 이렇게 선택지가 둘인데 여기는 마땅히 다닐만한 직장이 없잖아요.  

신윤호: 아, 그것도 있었다, 맥주! 서울에 있을 때 수제 맥주 만드는 취미가 있었거든요. 이게 너무 재미있어서 양양에 서핑하는 분도 많으니까 양양의 브랜드 맥주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양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로 우리 양양 가서 맥주를 만들자고 했죠. 그런데 현지 전통주 양조장도 가보고 좀 알아보니까 시설이라든지 우리의 여건으로는 쉽게 생각할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현실을 딱 마주하고 ‘이건 어려워. 그럼 이거 말고 농사를 지어야겠구나.’ 그렇게 시작했어요.


저는 양양에 와서 좀 놀랐던 게 생각보다 수도작을 많이 하는 거였어요. 제가 고향이 김해라서 벼농사는 드넓은 평야에서만 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벼농사도 하고 과수 농사도 많이 하고 두 분처럼 버섯 재배를 하는 분도 많다고 들었어요.

신윤호: 저희가 버섯을 선택한 건 되게 심플한 이유예요. 농업기술센터에서 귀농귀촌 관련 지원 업무를 같이 하기 때문에 저희도 처음에 농업기술센터에서 상담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 추천을 받은 작물 중 하나였어요. 농사를 짓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노지에서 농사짓는 분들처럼 막 땡볕에서 일하고 비 맞으면서 일하고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버섯은 시설 재배니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데서 일할 수 있고 해를 안 보고 일할 수 있구나, 일단 몸이 편하겠구나 싶었죠. 그리고 영농 기술이 전혀 없는 상태라는 것도 고려했어요. 작기가 긴 작물은 한 번의 트라이얼(trial)을 끝내는데 1년 정도를 잡아야 하잖아요. 그럼 내가 배울 수 있는 기회가 1년에 한 번인 셈인데 버섯은 작기가 되게 빨라요. 제가 했던 느타리버섯 같은 경우는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면 다 자라거든요. 쉽게 생각하면 파종부터 수확까지 기간이 짧기 때문에 트라이얼 에러(trial error)를 많이 겪으면서 영농 기술을 습득할 기회가 그만큼 많다는 점이 좋았어요. 그리고 느타리버섯은 전량이 서울 가락시장으로 올라가거든요. 저희는 도매를 봐요. 가격은 소매로 파는 것보다는 낮지만 재고 부담이 없어요. 주변에 지인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인맥으로 재고를 다 털 자신도 없었고, 도매는 재고 걱정이 없는 장점이 있어서 결정을 하게 됐죠.



농사는 일단 조직 생활이 아니니까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것보다 워라밸 조절할 수 있나요? 정년이 없는 일이기도 하니까 경력단절 없이 가정생활과 양립할 수 있는 장점도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그런가요?

신윤경: 실제로 농사로는 워라밸을 만족시킬 수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 저희 둘이 버섯을 키우면서 정말 잠잘 시간을 쪼개 가면서 일을 해도 남편이 서울에서 혼자 벌었던 소득에 훨씬 못 미치거든요. 그래서 워라밸을 고려하면 저희 생존이 위협이 커요. 워라밸은 생각처럼 좋지 않아도 저희가 농사를 지으면서 되게 많은 가능성을 봤어요. 항상 직장인의 마인드로 살았는데 농사는 저희의 사업인 거잖아요. 마음가짐 자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변했어요. 저희 모습이 달라진 게 되게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런 변화가 부담되거나 힘든 사람도 있을 텐데 두 분한테는 자극이랄까, 새로운 경험으로 여겨졌던 건가요?

신윤호: 오히려 잘 몰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둘 다 고향이 농촌도 아니고 부모님이 농사를 지었던 것도 아니고 농사에 대한 것도 아무것도 모르고 막연하게 하면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으니까요. 막상 해보니까 진짜 너무 힘들어요. 다른 사람한테 받는 스트레스 없이 마음대로 일정을 컨트롤할 수 있지만 그만큼 수익이 들쭉날쭉해진다는 점에 대한 위험 부담도 있고요. 기본적으로 저희가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을 하기보다는 꽂히면 일단 좀 해보고 몸으로 느낀 뒤에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 타입인 것 같아요. 그래서 쉽게 도전할 수 있고 그만큼 쉽게 바뀔 수도 있고, 장단점이 있죠.


저는 농사를 전혀 모르지만 단순히 생각해봐도 시설 재배면 초기 비용이 많이 들 것 같아요 그런 부분도 고려하고 시작하신 건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이 들 줄은 몰랐어!’였는지 궁금합니다.

신윤호: 후자예요. 돈이 많이 들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자꾸 돈이 들어가네.’ 였어요.


느타리버섯을 재배하셨는데 작물을 바꾸실 예정이라고 들었어요. 또 하나의 큰 도전 앞에 서 있네요. 

신윤호: 맞아요. 버섯 재배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둘째 아이가 버섯 포자에서 오는 알레르기가 점점 심해졌고, 지난해에는 좀 많이 심했어요. 아이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해야 할 이유는 없고, 그렇다면 변화를 줘야겠다 결심했죠. 올해는 좀 많은 변화를 가지려고 준비하고 있는 중이에요.


허브 재배를 생각하신다고 들었는데, 이것도 시설 재배인가요?

신윤호: 네. 기존에 버섯 재배사 시설이 있기 때문에 최대한 시설을 활용하는 쪽으로 다음 작물을 찾았어요. 재배 방식도 수경재배 쪽을 알아보았고요. 허브 쪽이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 선택했어요. 


워라밸은 생각처럼 좋지 않아도 농사를 지으면서
되게 많은 가능성을 봤어요.


저도 남편과 양양에서 원목 가구 공방을 하면서 처음으로 사업을 해봤거든요. 사업이라는 게 예상하지 못 한 리스크가 크고 그 부담을 온전히 내가 갖게 되는 게 힘들더라고요. 두 분도 처음 버섯 재배를 시작할 때는 알레르기라든지 이런 어려움을 예상하지 못하셨을 텐데요.

신윤호: 아무래도 사람이 좋은 쪽으로만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그리고 저희가 선도 농가나 여기저기 자문을 구하러 다녔고, 심지어 지금의 저도 조언을 해주는 입장이 되었지만 힘들었던 점이나 안 좋았던 일은 잘 기억도 안 나고 공유도 안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런 일이 생길 줄 전혀 몰랐죠. 


일 자체만 두고 봤을 때 농사가 적성에 맞는 편이었나요?

신윤경: 저는 농사의 부수적인 일들, 그러니까 작물을 키우는 것 외에 판매하거나 포장하는 일이 재밌었어요. 반면에 작물 키우는 건 정말 안 좋아하는데 그건 남편이 100% 다 감당을 해요. 다행히 이 사람은 그 일이 되게 적성이 맞는 사람이거든요. 

신윤호: 저는 농사를 실제로 지어보고 ‘천직이구나!’ 싶었어요. 업무 강도가 조금 더 낮아지고 수익이 개선된다면 평생 해도 좋겠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살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게 저는 손으로 직접 만들고 키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작물이 하루가 다르게 크는 게 눈에 보이는데 그걸 보는 게 너무 즐겁더라고요. 또 농사는 내가 이렇게 크길 바라면서 방향을 유도했더니 실제로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게 좋아요. 사람은 바뀔 수 있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데 식물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정직하게 결과가 나오니까요. 결과물, 그러니까 내가 생산한 농산물이 나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수단인 것 같은 거예요. ‘이 사람이 농사를 잘 지었구나.’가 아니라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했구나.’라는 게 단번에 보이는 거라서 그 점이 되게 좋아요.


직접 재배를 하면서 깨달으셨다고 하셨는데, 선입견이지만 전자 전공이라고 하면 원래 손재주가 좋다거나 데이터를 넣었을 때 정확한 값이 나오는 거를 좋아하는 성향일 것 같거든요. 

신윤호: 원래 그런 편이었는데 그걸 여기서 깨달았어요.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어릴 때부터 그런 걸 되게 좋아하고 잘하는 아이였구나 싶은 거죠. 그런데 도시에서 살 때는 못 느꼈어요. 느낄 겨를도 없었고 나를 돌아볼 시간도 없었고, 그게 저한테는 중요하지도 않았고요. 여기서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까 ‘아, 내가 이런 걸 좋아했었네.’ 하고 알게 된 거죠.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맞아, 나 이거 어렸을 때부터 했던 건데!’ 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많더라고요.


반면에 윤경 님은 부수적인 것이 좋다고 하셨어요. 대개 그런 일은 반복 노동이라서 안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신윤경: 저도 제가 뭘 좋아하는지 여기 와서 알게 된 것 같아요. 일단 도시에서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어요. 농사는 몸으로는 일을 하고 있어도 머리는 깨끗하잖아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정말 많았어요. 저희 둘 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죠. 예전에 헬스조선에서 병원 마케팅 기획 일을 할 때 되게 재밌고 저랑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맥락에서 판매 관련 일이 제게 잘 맞았어요.



두 분이 양양에 연고가 없었고 아이들이 어렸기 때문에 육아를 도와줄 손이 없다는 건 또 다른 어려움이지 않았나요?

신윤경: 다행히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처음에 양양에 와서 읍내의 코아루 아파트에 살았는데 거기에서 만난 또래 엄마들이 있었어요. 급한 일이 생기면 부탁했고, 마치 공동 육아 같았어요. 같은 아파트에 사니까 어느 날은 이 집 가서 다 같이 밥 먹고 어느 날은 저기 가서 먹고. 제가 어렸을 때는 이렇게 마을에서 다 같이 놀았는데, 그런 느낌인 거예요. 서울에서는 그런 게 좀 어렵잖아요. 여기서는 그게 가능해서 너무 좋다는 생각을 했죠. 또 하나는 어린이집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읍내의 디모테오 어린이집을 다니는데, 제가 갑자기 아파서 응급실을 갔을 때 수녀님이 밤늦게까지 저희 애를 봐주셨어요. 집에 오셔서 아이를 봐주시는 돌봄 선생님 도움도 받았고요. 농업인이라서 보조를 90% 정도 받아서 저희가 내는 비용이 되게 적어요.


지금은 아이들이 좀 자라서 귀촌 초기보다는 농사와 육아를 양립하는 게 좀 편해졌나요?

신윤호: 많이 수월해졌죠.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을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낮 시간에 조금 여유가 생겼어요. 


젊은 사람이 귀촌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자녀 양육 문제더라고요. 관내에 소아과가 없다든지 기본적인 인프라가 없으니까 고민을 많이 하는데, 두 분은 어떠셨어요?

신윤호: 좀 죄송한 말이긴 한데 병원 서비스에 대한 신뢰가 조금 낮긴 해요. 


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강릉이나 속초의 병원에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죠.

신윤경: 병원이 있고 의사가 있어도 전문의가 아니니까요. 양양에는 소아과 전문의가 없잖아요. 

신윤호: 가끔씩 큰 병원에 급하게 가야 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 것에 두려움도 있어요. 양양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내가 갑자기 병원에 가야 했는데 그때는 아이가 한 명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면 단순히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강릉이나 속초로 이동하는 동안 증상이 악화할 수도 있고요.

신윤호: 기본적인 인프라에 대한 걱정은 아무래도 있을 수밖에 없어요.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데 어느 정도 살다 보니까 이 인프라에 익숙해져서 저는 나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신윤경: 제가 병원에 급하게 가야 했을 때 119 구급차를 타고 갔거든요. 강릉 아산병원까지 딱 23분이 걸리더라고요. 사실 서울에서도 인근 대학병원에 가려면 30분은 걸리잖아요. 저는 오히려 응급실 갔던 경험을 통해서 이곳의 의료 시설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걱정인 건 아무래도 교육 문제죠.


아이들이 크면서 점점 더 교육이 신경 쓰인다고 하더라고요.

신윤경: 물론 저희는 흔히 생각하는 사교육 코스를 밟아가는 걸 원하지 않아서 여기로 올 수 있었어요. 저희가 양양에 간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제일 걱정한 게 “애 교육은 어떡하려고 그래?” 였어요. 저희 나름의 교육 철학이 있어서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여기서 살다 보니까 오히려 커리큘럼이 발도르프 학교나 혁신학교 같기도 해요.


일부러 작은 학교를 찾아서 오시는 양양으로 오는 부모님도 있다고 들었어요.

신윤경: 속초에서도 양양의 학교로 아이를 보내기도 해요. 아직은 아이들이 어리고 초등학교 교육은 되게 만족하고 있어요. 아이도 좋아하고요. 하지만 중학교에 진학하면 저희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죠.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일하면서 양양중학교나 양양고등학교 선생님과 얘기를 할 기회가 있어요. 좀 놀랐던 게 중고등학교에 올라가면 도시와 학력 격차가 꽤 커지더라고요. 서울에서 귀촌 한 사람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주류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잖아요. 좋은 고등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갔을 때 어떤 혜택이 있는지 이미 알고 있으면 도시와 지역의 차이에 조금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신윤경: 저도 아이가 자라면 그럴 것 같아요.

신윤호: 초등 교육까지는 부모의 성향에 따라서 장단점이 명확하죠. 아이들끼리의 문화 같은 게 있잖아요. 이런 것은 저희가 어릴 때와 비교하면 도시와 지방의 격차는 많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한편으로 걱정하는 게 부족한 인프라나 문화 수준이 장기적으로는 어떻게든 아이한테 영향을 끼칠 수 있는데 그건 당장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진단을 못하는 거예요. 저도 가끔 서울 가면 놀랄 정도로 많이 바뀌어 있더라고요. 배달 앱을 쓰고 공유 킥보드 타는 걸 자연스럽게 보고 자란 아이와 저희 아이 중에 누가 더 낫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차이가 있는 건 분명한데 그게 과연 아이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의문이에요. 

신윤경: 저는 그런 문물은 애들이 순식간에 다 배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맞아요. 스무 살에 대학을 가서 조금만 경험하면 금방 배울 수 있는 부분이죠.

신윤경: 그런 건 정말 빨리 배우는데 이런 자연환경을 누리면서 크는 건 도시 아이들은 결코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이 자연을 누리게 해주는 게 더 큰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역 사회가 작아서 운신의 폭이 좁다는 생각을 하나요? 양양은 텃세가 강한 곳이라고 하고, 흔히 농촌 지역은 더 심하다고 하는데 직접 경험한 사례가 있으세요?

신윤호: 있어요. 모르고 왔기 때문에 시작한 건데 알고 보니까 사람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한 곳이더라고요. 저는 좀 특이한 케이스인 게 대부분의 농업 하는 분들처럼 노지 밭작물이나 수도작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특용 작물의 시설 재배를 하다 보니까 마을 주민과 유대 같은 건 오히려 없어요. 접촉 자체가 없어요. 애초에 서로가 서로의 작물에 대해서 모르고요. 이분들도 평생 농사를 지으셨지만 버섯 농사에 대해서 전혀 모르시고 크게 관심도 없으시고, 저도 마찬가지라서 농사를 짓는 데 있어서는 마을 조직과 철저하게 분리할 수 있어요. 반면에 버섯 재배를 하는 사람끼리의 유대는 되게 중요해요. 버섯도 협동조합이 구성돼 있어요. 품앗이 형태로 각 농가마다 일을 도와주러 많이 다니고요. 그렇게 해야 조합 내에 모든 농가가 운영이 되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고요. 같은 조합원들은 매일 출퇴근하는 것처럼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항상 일을 같이 해요. 부탁을 들어줘야 할 때도 있고 제가 부탁을 할 때도 있죠. 


처음 생각과 달리 온전히 혼자 일하는 구조가 아니었네요.

신윤호: 네.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제가 좀 유명해졌어요. (웃음) 젊은 사람이 농사를 지으러 왔는데 그것도 양양 특화 작물인 버섯 농사를 짓는 거죠. 게다가 제가 재배하는 버섯이 단가가 꽤 높은 편이었거든요. 저 친구가 조합에 들어왔는데 매출이 제일 높다는 이야기가 도니까 농촌기술센터나 관계자 분도 저를 아시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제가 뭘 할 때도 약간 눈치가 보여요. 내 농사를 짓는 거지만 조합 눈치도 봐야 하고 센터 눈치도 봐야 하고 가끔은 군청 눈치도 봐야 하고 그게 좀 많이 힘들었어요. 그리고 농협에 가면 진짜 재밌어요. 창구에 업무를 보러 가면 옆에 계시던 직원이 “신윤호 씨, 잠깐 이리로 와보세요.”라고 하면서 제가 지난해에 가입했던 작물 재해보험의 올해 보험료 산출을 다 끝내신 상태로 금액을 알려주면서 언제까지 납부하면 된다고 얘기하거든요. 제가 묻지 않았는데요. (웃음) 이 모든 게 원스톱으로 이뤄지는 거예요.

신윤경: 처음에는 너무 당황했죠.

신윤호: 되게 빨리 익숙해진 것 같아요. 불쾌하다기보다는 신기하다는 감정.

신윤경: 알아서 챙겨주니까 고맙기도 하죠.


분명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편으론 좀 겁나는 게 나의 다른 데이터에도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내게 너무 관심을 갖고 있는 거잖아요.

신윤호: 매사가 너무 조심스러워지는 거예요. 어디서 누가 나를 보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실제로 읍내를 걸어가면 “어디 가? 나 지금 너 봤어.” 이런 전화도 오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누구를 만나서 감정 상하는 일이 있어도 불쾌하다는 표현을 못하겠어요. 이분이 나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누군가의 아버지일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흔히 조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 중에 하나가 운신의 폭이 되게 좁을 때 사람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받는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이곳은 조직의 크기가 확장됐을 뿐이지 구조는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도 편견일 수 있지만, 이곳은 도시에 비해서 더 열심히 나에 대해서 얘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신윤호: 맞아요.


그런데 그게 나이 드신 분만 그런 게 아니에요. 나이의 문제가 아닌 거죠.  

신윤호: 도시만큼 외부 자극이 없는 곳이잖아요. 새로운 일도 없고 즐거운 일도 없고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 이야깃거리를 찾아다니나 보다 생각해요.


두 분에게 주위에서 관심을 가진 이유들 중에 아까 잠깐 말씀하신 대로 작물의 단가가 높았던 부분도 있잖아요. 하지만 이건 상대적인 거고, 지금 농사일에 투자하는 절대 시간을 서울에서도 일했으면 벌었을 소득과 비교하면 아까 잠깐 얘기한 것처럼 말도 안 되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것 같거든요. 

신윤경: 일단 서울에는 남편이 혼자 일했고 지금은 둘이 일하는 걸로 비교를 하면 차이가 크죠. 

신윤호: 한 3분의 1 수준이에요.


흔히 지역에서는 생활비가 적게 들 거니까 소득이 줄어도 상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물가가 비싼 관광지에서 생활비가 더 드는 부분도 있지 않나요?

신윤호: 실제 생활비가 이주 초반에 조금 줄기는 했어요. 저희가 키우지 않는 작물도 주변에서 많이 주시고 버섯이랑 바꿔 가시기도 해서요. 공산품 제외하면 물고기도 주시고 되게 많이 받을 때도 있었어요. 그리고 도시에서는 집에서 꾸준히 밥을 해 먹지 않았거든요. 외식도 많이 하고 배달 음식도 많이 먹고. 그런데 집밥을 해 먹고 여기는 배달도 안 오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생활비가 조금씩 줄어들었죠. 또 도시에서는 주말마다 뭔가를 해야 했어요. 아이랑 평일 내내 잘 못 봤으니까 주말에 어디든 같이 나갔죠.


야외 활동이든 문화생활을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신윤호: 네. 미세먼지 때문에 외부에 나가기는 힘드니까 주로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자주 갔거든요. 밥 먹고 쇼핑하면서 소비를 하는 거죠. 여기는 그런 게 없으니까 절약되는 부분이 초반에는 있었어요.



양양에 와서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이건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내가 내 몸을 써서 아이와 함께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부담이 커진 걸 수도 있잖아요. 저는 아이가 없어서 모르는 영역이라 여쭤보는 거예요.

신윤경: 오히려 여기서는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어서 좀 수월해졌어요. 서울에서는 제가 계속 가정보육을 했거든요. 

신윤호: 저는 여기 와서 아이를 보는 시간이 더 줄어들었어요. 서울에서는 주말 이틀 중에 한 번이라도 회사에 안 갈 때가 있는데 농사일은 주말이 따로 없잖아요. 

신윤경: 절대 시간 자체는 줄었는데 시간 배분을 저희가 할 수 있잖아요. 아침에 어린이집 갈 때는 같이 있어 준다거나 저녁 식사를 꼭 같이 한다거나. 그래서 시간 자체는 줄었는데 더 오래 함께 있는 느낌이에요.

신윤호: 네, 농도가 진해졌다고 할까요? 코로나 이후에도 저희 아이들은 꾸준히 학교와 어린이집에 빠짐없이 갔거든요. 만약에 도시에 계속 있었으면 달랐겠죠. 못 가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코로나 사태 이후로 회사 다니는 부모님이 정말 고생을 하시더라고요.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신윤호: 오히려 여기가 더 부모를 살려주는 곳이에요. 약간 숨통을 틔워 주는 곳이죠. 


주말이 따로 없다는 건 버섯 농사의 루틴이 정해져 있기 때문인가요?

신윤호: 맞아요. 매일 해야 하는 루틴이 있고 그 루틴이 1시간 짜리냐 10시간 짜리냐 하는 건 월 단위로 달라지고요. 버섯은 생물이고 적기에 수확하지 않으면 상품성을 잃을 정도로 자라기 때문에 신경 써야 해요. 하루에 아침저녁으로 적게는 두 번, 보통 세 번 정도 따줘야 하고 물도 줘야 하고 딴 걸 선별하고 포장도 해야 하고. 수확하는 양이 많냐 적냐에 따라서 이 모든 게 한두 시간에 끝날 수도 있고 하루 종일 해도 안 끝날 수도 있고요. 이걸 안 하면 그날 돈을 못 버는 거니까 생계와 연결이 되는 문제죠.


듣고 나니 정말 당연한 얘기인데 버섯이 생물이라는 생각을 못 했어요. 소 키우는 분이 여물을 줘야 해서 어디 여행도 못 간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면서 버섯도 그럴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네요.

신윤호: 저희도 아무 데도 못 갔어요. 여행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서울에 1박 2일로 다녀오고 싶어도 잘 안 돼요. 이 수확을 포기하고 가야 하는데 그 포기에 대한 결과를 제가 전부 안아야 하니까요. 어딘가 꼭 가야 하면 버섯을 다 수확해서 모든 작업을 끝낸 뒤에 새로 파종을 안 하고 비어 있는 상태로 가는 건 가능한데 그럼 다시 파종한 걸 수확할 때까지의 공백을 또 기다려야 하죠. 열흘 쉬었다고 단순히 열흘 치 돈을 못 버는 구조가 아닌 거죠.


서울에서 하던 일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지금 여기서 투자하는 시간이나 노력만 놓고 비교했을 때 일한 만큼 충분한 소득을 얻고 있다고 할 수 있나요? 농사가 들이는 품에 비해서 너무 소득이 적은 게 쌀 같은 경우에는 중간 유통 구조 때문이라고 하지만 특용작물은 좀 다른가 싶어서요. 

신윤호: 저희는 경매를 보기 때문에 경매가의 등락 폭이 정말 터무니가 없는데 그것에 대해서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도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어요. 예를 들어 똑같은 버섯을 10박스 수확해서 오늘 5박스를 경매에 내고 다음날 5박스를 낸다고 하면, 오늘 낸 것의 경매가가 1만 5천 원인데 다음 날은 3천 원, 5천 원이 되기도 해요. 저희 입장에서는 정말 물리적으로 똑같은 버섯인데 다만 경매 시점이 달랐을 뿐이죠. 박스로 포장하고 서울까지 보내는 운송비보다 낮은 가격에 낙찰받는 경우도 있었고요. 그러면 출하하는 것 자체가 손해를 보는 거죠. 예전에 TV에서 농민들이 마늘, 파 가격이 안 좋다고 밭을 막 갈아엎는 모습을 보면 이해를 못 했거든요. ‘다 멀쩡한 건데 왜 안 팔지?’라고 생각한 거죠. 지금은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아요. 


수확하는 인건비가 더 들고 그게 손해인 구조인 거죠.

신윤호: 그걸 수확해서 선별하는 시간이 오히려 마이너스인 거예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갈아엎는 게 낫죠. 그래도 버섯은 어느 정도 일정한 가격이 유지가 된다면 나쁘지 않은 작물이에요. 제가 도매로 판매하는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에 가격의 등락이 있고 그 폭이 되게 크다는 것은 어려운 부분이죠. 제가 파는 버섯이 평균적으로 한 박스 경매가가 1만 원 정도예요. 그걸 구매하는 최종 소비자가 직거래를 원해서 제게 연락하실 때가 있어요. 제품에 판매자 정보가 있으니까요. 그분한테 얼마에 구매했는지 물어보면 한 3만 원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차이가 되게 많이 나는 거죠. 그래서 직접 판매하는 게 가장 이윤이 많이 남지만 그게 또 쉬운 건 아니에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농업으로 먹고사는 게 진짜 힘들구나 하는 고민은 항상 있어요.


불가피하게 작물을 변경하는 결정을 하셨지만, 변경 작물을 선택할 때는 이런 상황이나 지금까지 경험을 고려해서 선택하신 거죠?

신윤호: 버섯 재배를 하면서 좀 더 보관이 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키웠던 느타리버섯은 보관 기간이 정말 짧거든요. 생물 상태로는 일주일을 채 못 가요. 그래서 보관 기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고 가공 용이성이 높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허브를 선택한 것도 생물은 물론이고 건조 형태로도 유통이 되기 때문에 보관 측면에서도 좀 더 용이해지고, 엄청 여러 가지 형태로 가공이 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직접 가공을 할 수도 있고 좀 더 많은 선택지가 생길 것 같아서 선택했죠.


허브 재배는 올해 어떻게 진행하실 계획인가요? 

신윤호: 기존에 있던 버섯 재배 시설에서 시설 변경이 조금 필요해요. 변경을 했을 때 원하는 대로 잘 자라는지 확인도 좀 필요하고요. 그래서 지금 테스트베드로 변경을 하고 있는 중이고 2월 말이나 3월 초쯤에 실제로 키우기 시작할 것 같아요. 사이클이 돌아가는 걸 보고 잘 되면 그 이후에는 다른 공간에도 확장을 해서 적용을 하고, 만일 생각한 대로 잘 안 되면 또 다른 시도를 해야죠.


올해는 일단 테스트를 하는 시기군요. 

신윤호: 네. 그런데 테스트를 하면서 돈도 벌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기존에 농사짓던 재배 공간 말고 옆에 여유 공간이 좀 있어서 거기에 체험 농장을 해보려고요. 


체험 농장이면 어떤 것을 할 수 있나요?

신윤호: 기존에 체험 농장은 특정 작물에 특화된 체험이 대부분이에요. 딸기, 감귤 수확을 하거나 그걸로 가공을 해보거나. 저희는 농촌이라는 곳 자체를 잘 모르는 도시 아이들한테 농촌이 어떤 곳인지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요. 농촌이 사시사철 변하는 모습과 계절에 맞춰 때마다 할 수 있는 것들이요. 저희 애들은 가을에 밤을 주워 온다거나 겨울에 솔방울을 줍거나 풀이 무성할 때는 개구리나 벌레를 잡거나 하는 게 자연스럽거든요. 계절마다 농촌의 모습이 다르고 그때마다 할 수 있는 것이 다른데 이걸 경험하게 할 수 있는 정말 그냥 말 그대로 농촌 체험 공간이에요. 


여름방학 때 시골 외갓집 가는 것과 비슷하네요.

신윤호: 맞아요. 예를 들어 한 번 딸기 농장에 체험을 간 사람이 다음에 다른 지역 혹은 그 농장을 다시 방문하는 일은 잘 없을 것 같은데, 계절마다 할 수 있는 게 조금씩 달라진다면 좀 더 자주 방문하지 않을까요? 저희가 애들이랑 가을에 곶감을 말리거나 여름에 개구리를 잡은 걸 sns에 올리면 친구들이 신기해하고 부러워하더라고요. 의외로 도시 사람들이 그런 걸 하고 싶어 하더라고요.  


농촌이라는 곳 자체를 잘 모르는 도시 아이들한테
농촌이 어떤 곳인지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요.


지금까지 경험한 어려움과 즐거움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다시 선택할 기회가 온다면, 지금보다 더 빨리 혹은 더 늦게 서울을 떠날 생각인가요?

신윤경: 저는 양양에는 다시 올 거예요. 양양에 대한 만족도는 정말 높고 살면 살수록 더 좋은 지역이에요. 그런데 농사는 너무 힘들어요.

신윤호: 저도 양양에 다시 올 거예요. 그리고 농사도 어떤 형태로도 짓긴 지을 것 같아요. 하다 못해 텃밭이라도 일굴 거예요. 버섯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 지역에서 잘 안 하는 작물을 해보고 싶어요. 허브도 그런 도전이에요. 남들도 다 하는 뻔한 작물 말고 다른 걸 해보고 싶어요. 아직 고민 중이긴 한데 이곳이 필요로 하는 작물이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양양은 저희가 처음 왔을 때보다 관광객도 많고 외지인 유입이 많아지면서 많이 변했잖아요. 음식도 저희가 왔을 때까지만 해도 장칼국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새로운 레스토랑도 많이 생겼으니까 기존에는 없었는데 지금은 필요한 작물이 뭔가 있지 않을까요? 


맞아요. 요즘은 꼭 레저 스포츠에 관심이 없어도 양양에 오는 분이 굉장히 많은데, 막상 딱히 할 게 없죠. 

신윤호: 아직도 양양과 속초 구분이 모호한 분들이 많잖아요. 도시 사람들에게 양양을 좀 더 각인시킬 수 있는 일에 제가 일조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되면 앞으로 허브와 병행을 하거나 허브 다음으로 도전해볼 생각이에요?

신윤호: 네, 양양에 갔는데 허브와 관련한 어떤 상품이 너무 좋았거나 그 농장에서의 경험이 너무 좋았다 이런 식으로 양양과 이미지가 잘 연결이 되는 새로운 걸 제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분이 처음 서울을 떠나 양양에 가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어떤 이야기를 하셨어요?

신윤경: 저희는 양가 부모님이 다 지지하셨어요. 제 부모님은 원래 제 결정을 항상 존중하는 분들이라서 좋은 생각이라고 하셨고, 시부모님께서는 저희가 양양에 오기 1년쯤 전에 먼저 제주도로 귀촌하셨어요. 시골 생활을 해보시니까 너무 좋으셨고, 너희도 애들 키우려면 시골이 더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신윤호: 어머니는 제가 회사 그만두고 양양 간다고 하니까 “그만둘 줄 알았다.”라고 하셨어요.


당시 윤호 님은 4~5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셨던 시기인데 어머님께서는 왜 그렇게 말씀을 하셨던 걸까요?

신윤호: 조직 생활을 하기에 적합한 성향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신윤경: 당신을 잘 파악하고 계셔. (웃음)


윤경 님이 배우자 입장에서 보기에도 윤호 님이 그런 성향인가요?

신윤경: 저는 몰랐어요. 스트레스받는 걸 표현 안 하고 다 혼자 삭히는 성격이거든요. 양양에 와서 표정이 좋아지고 사람이 되게 많이 변한 걸 보고 진짜 이런 생활이 잘 맞는 사람이구나 깨달았죠. 저는 여기 와서 알았어요.


조직 생활이 잘 맞지 않는 성향이라고 해도 함께 일할 동료가 한 명도 없으면 아쉬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거든요. 윤호 님은 어떠셨어요? 

신윤호: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저는 약간 주변으로부터 자극을 받아야 일을 하는 타입이었나 봐요. 혼자서 하는 일은 관리하는 사람도 나이기 때문에 나태해지면 끝도 없이 나태해질 수 있잖아요. 물론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경험적으로 그만 놀아야겠다 판단하죠.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건 이 과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내 한 사람뿐이라는 거예요. 직장 동료가 아니라도 친구일 수도 있는데 이런 관계가 없어도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기 와서 처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괜찮은 게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게 되게 힘들었고, 어떻게든 좀 아는 사람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버섯 조합이라든지 마을 주민은 다들 연령대가 엄청 높아서 저랑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저도 이런 마음만 있지 되게 소극적이고 소심한 내향형이기 때문에 막상 소개를 받아서 만나면 또 불편한 거예요. 그렇게 한 2~3년을 보냈더니 너무 힘들었어요. 다행히 4-H에 가입을 하고 제 또래 친구가 이렇게 많았구나, 그것도 농사짓는 친구들이 이렇게 많구나 라는 걸 알게 돼서 많이 위안이 됐어요. 무엇보다 지금은 혼자 노는 법을 깨우쳤어요. 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많고 서울에서는 물리적 공간이나 시간 때문에 엄두도 못 냈던 취미를 여기서는 할 수도 있으니까요. ‘내가 이런 것도 할 줄 알았구나,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깨달으면서 찾아가는 재미도 있어서 지금은 많이 극복을 했어요. 


어떤 취미가 있나요?

신윤호: 뭘 만드는 걸 좋아해요. 바비큐 요리하는 걸 되게 좋아하거든요. 서울에서도 하고 싶었는데 못 했어요. 막 연기 피워가면서 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 여기 와서 제일 먼저 했던 게 바비큐를 마음껏 하는 건데 해보니까 너무 재밌는 거예요. 아이들 놀이 시설 만드는 것도 좋아해요. 주로 철공 쪽인데요. 시골에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용접 같은 걸 해야 하니까 필요해서 시작했는데 되게 재밌는 거예요. 그래서 괜히 “뭐 만들어줄까?” 하고 물어봐요. 계속 도시에 있었으면 이걸 평생 몰랐을 텐데 그런 면에서도 만족도가 되게 높아요.


윤경 님은 어떠세요? 또래 친구가 좀 있는 편인가요?  

신윤경: 처음 코아루 아파트에서 살 때 맺은 인연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그 사람들이 또 소개를 해줘서 양양에 사는 제 또래 엄마들은 대부분 알아요.

신윤호: 장난 아니에요. 다 알아요. (웃음)


그분들과 교류하면서 정서적인 부분이 충족이 되어서 특별히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이 없군요. 

신윤경: 네. 서울에서는 다 비슷하게 살잖아요. 4년제 대학 나와서 직장 다니고 그런 사람들만 만났는데 여기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큰 기업체 운영하는 분도 만나고, 농사짓는 분도 만나고.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다양하게 사는구나 하는 걸 아는 게 너무 재밌어요.

작가의 이전글 좀 다른 걸 기대하는 분들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