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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Oct 04. 2024

무명초

낫고, 낳고, 나아가기

첫 항암제를 투여하고 하루가 지나자 얼굴이 전체적으로 약간 붓고 뾰루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몸이 지끈거리고 손가락 마다 마디의 뼈가 시큰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튿날이 되자 신기하게도 머리카락이 하나둘씩 툭, 툭 낙하했다. 마침 집에 이발도구가 있었던 지라 직접 머리를 밀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솟았다. 나는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기로 마음을 먹고 거실에 신나는 음악을 크게 틀고서 화장실 거울에 머리 이쪽저쪽을 비추어보며 긴 머리를 밀었다. 


막상 머리카락이 한꺼번에 없어지자 내 상황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빠른 속도로 진행될 탈모 현상을 쓸쓸한 마음으로 지켜보기보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내게 일어난 변화는 분명 슬픈 일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내 민머리를 보고 있자니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유방암을 진단받고 혼란스럽던 시기, 마치 운명처럼 만나게 된 비구니 스님이었다. 처음 만난 생면부지의 나의 상황을 들으시고는 절에서 만든 보약같은 각종 장류와 귀한 기름들을 선물로 잔뜩 쥐여주시기도 한, 감사한 분. 그분이라면 꼭 스님처럼 머리를 밀게 된 나의 상황을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메일에 나의 근황을 전하며 ‘스님께는 머리카락이란 무엇인지’ 여쭈어 보았다. 스님은 천진난만하기만 한 나의 질문에 이렇게 답을 보내오셨다.


“불교에서의 머리카락은 무명초*라고 합니다. 머리카락이 있으면 망상이 생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감아야지, 꾸며야지, 파마해야지, 색 입혀야지, 길면 자르고 싶고… 아침에 일어나면 부스스하지, 샴푸값 많이 들지... 머리카락이 없으면 그만큼 망상도 없어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답니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여성이라는 의식도 끊어진답니다. 그래서 중성의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고요. 또한 마음의 공부 그 하나만 하면 되니 좋은 점이 많답니다. 그만큼 머리카락은 집착입니다. 그래서 무명초라고 하는가 봅니다.”


스님의 답장을 읽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머리카락 없이 지내는 일상에 대한 두려움이 옅어지는 듯했다. 자라나는 무명초를 매일같이 밀어내고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닦으려 애쓰는 수도자의 마음을 닮아보는 몇 개월을 지내봐도 좋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머리카락이 모두 사라진 두피는 너무나 여리고 섬세해서 그저 시속 3-4km를 걷기만 해도 스치는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며칠 시험 삼아 동네를 다녀본 나는 가발을 사지 않기로 했다. 물론 암병원을 오가면서 목격한 항암 가발, 항암 모자의 방대한 세계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경우엔 그것을 머리에 써야 할 필요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머리카락이 없는 생활이 예상보다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대신 나는 나에게 예쁜 모자 하나를 뜨개질해 떠 주기로 했다. 민머리로 생활해 보니 당연하게 생각해 온 머리카락에는 여러 가지 크고, 사소한 위험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 역할이 상당했기에, 이를 대체할 모자가 꼭 필요했다. 


마음에 드는 색의 털실을 정성껏 골라서 손 끝의 감각에 집중해 여러 날에 나누어 천천히 떴다. 

일주일에 한 번 맞는 항암을 몇 차례 맞고 나니 눈썹과 속눈썹, 콧속의 코털까지 자취를 감추었다. 몸에 돋아난 ‘무명초’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번뇌를 자아내는 것이 분명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슬픈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쓸려 나갔다. 


거실에 난 창으로 라일락 향기를 맡으며 뜨개질 꾸러미를 안고 흔들의자에 앉아 있노라면 이런 오늘에도 숨겨진 소소한 기쁨이 있다는 것이 나를 미소 짓게 했다. 그렇게 봄, 여름엔 까실하고 얇은 실로 낙낙하게 뜬 챙이 달린 모자를,  가을, 겨울엔 보드랍고 따뜻한 실로 촘촘히 뜬 동그란 비니를 썼다. 손수 만든 모자들을 쓰고 항암을 모두 끝냈다. 





*무명초는 가느다란 잎을 가진 풀 종류로,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초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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