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성명학
교사인 내가 가장 많이 접하는 인간의 요소 중 하나가 성명이다.
매년 2월 중순이 되면 받아들게 되는 아이들의 명단을 차근히 살펴보는 것을 몇 번 정도 하다보면 이 시기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낳고서는 어떤 어감의 이름을 선호했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이름은 보통 세 글자로 이루어져있다.
거기서 거기인 성씨를 제외하면 사실상 뒷 두 글자만이 그 사람의 개성을 드러내는 이름일 것이다.
이 제한적인 두 글자마저도 한 글자는 돌림자인 경우가 많다.
나의 이름, 혹은 내 자녀의 이름은 돌림자가 아니라고?
가문의 돌림자만이 돌림자가 아니다.
내가 느끼는 바에 따르면 시대별로 유행하는 이름 글자
즉, '시대의 돌림자'가 존재한다.
시대의 돌림자는 요즘 아이들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이름은
순자 영자 미자 정숙 미숙 영숙 경숙 경자
미영 미경 영주 선주 선영 은영 은경 은주 지영
민지 은지 유빈 은혜 지혜 유진 현지 현진 혜지 혜진
남성의 이름은
영수 영호 영식 영철 병철 성철 동수 경식
지훈 경훈 성훈 정훈 성호 상훈 성진
현우 동현 성민 민재 민수 승현
흔하게 사용하는 어감의 이름을 시대순으로 나열해보자면 이런 느낌으로 배열될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대의 이름들 사이에는 미묘하게 겹치는 돌림자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름의 어감이 가진 시대의 느낌은 상당히 강력해서 '김경자'씨라는 이름만 이야기해도 사람들의 머리 속엔 한 60대 여성이 빠르게 떠오르게 된다.
복잡 다원화된 21세기에는 꽤나 개성적인 이름이 많은 듯 하지만 내가 매년 초 받아드는 출석부를 보면 시대의 돌림자는 분명히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체감상 흔한 글자는 '율' '도' '아' '서' '준' 이 다섯 글자이다.
0율, 도0, 0아, 서0, 0준 패턴의 이름은 특히 흔해서 한 학년에 한 명정도는 '민준'이를 볼 수 있다.
시대의 어감을 가진 이름에는 분명히 장점이 존재한다.
가장 큰 장점은 세련되고 예쁜 어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일 것이고, 학교나 직장에서 이름으로 인해 놀림받을 일이 매우 적어진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허나 나는 개인적으로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유행하는 글자는 피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아무리 어감이 좋더라도 시대의 이미지를 뒤집어쓰는 순간 필연적으로 촌스러운 이름이 되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경숙이나 미숙과 같은 이름이 1960년대에도 촌스러운 이름이었을 리는 없을 것이고, 또 지금 따져봐도 영숙이라는 이름이 촌스러울 이유는 하나도 없다. 다만, '숙'이라는 글자가 가진 강력한 특정 세대의 이미지로 인해 이름 전체가 '이미 지나가서 아무도 그렇게 안 짓는 이름'이 되어버린다. 내가 지어준 자녀의 이름이 훗날 '누가 요즘 아저씨 이름처럼 이름을 지어요?'가 되어버린다면 조금 서글퍼지고 미안해질 것 같다.
둘째, 흔한 이름이 리스크는 적을 지언정 개성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민지'를 떠올려보자. 상당수의 사람이 큰민지&작은민지. 이민&김민 과 같은 방식으로 동명이인을 구별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흔한 이름의 소유자는 그럴듯한 개성이 있지 않았다면 그냥저냥 지나가는 친구로서 기억된다. 반면 독특한 이름의 소유자를 떠올려보자. 생각해보면 딱히 개성적인 친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특이하다, 혹은 강렬한 이름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떠오르는 친구가 한 둘은 있을 것이다. 꽤나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놀림'이라는 리스크를 분명히 짊어지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개성'이라는 무기를 큰 힘 들이지 않고 가지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이름이라는 걸 내 마음대로 혼자 짓지는 않겠으나 상술한 두가지 이유로 인해 내 아들의 이름은 최소한 0준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무언가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게임 캐릭터같이 인생과 하등 상관없는 것의 이름을 짓는 것도 어려운데 한 개인의 일생을 결정지을 지도 모르는 '자녀'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우면서 무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이름이란, 어감이 나쁘지 않으면서 개성적이고 시대를 타지않는 이름인데 이런 자녀 이름 생각해내려 성명사전을 뒤적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명치 끝이 꾹 눌려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