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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과 흐릿한 경계 사이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리뷰

나는 누구일까?


<정체성>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들었던 여러 가지 뒤엉킨 상념 중 가장 강렬한 의문 한 가지가 떠올랐다. 누구도 답을 해줄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니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 책의 리뷰를 대체 어떻게 써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항상 리뷰를 쓸 때 나만의 결론을 내리고 글을 전개해나갔다면, <정체성>을 읽고서는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그저 내 안의 경험들을 하나씩 꺼내보고 스스로 얼마나 모순적이었는지, 또 내가 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체성>은 더 이상 남자들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것에 씁쓸해하는 샹탈과 그녀의 애인 장마르크가 미지의 남자로서 연서를 보내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로맨틱하거나 극적인 전개는 없지만 샹탈과 장마르크의 속마음과 욕망, 노골적인 생각들이 가감 없이 나타난다.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어떠한 정체성을 형성하는지, 때로는 그것이 얼마나 낯설어지는지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샹탈’을 통해 여성이 느낄 수 있는 모순적이고도 기묘한 심리를 알 수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과 평화로운 일상을 살면서 동시에 남자들의 시선을 욕망한다. 책에 서술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천박하고 음탕한 익명의 시선, 호감이나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랑도 예의도 없이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녀 육체로 쏟아지는 시선이다.”라는 말처럼, 남자들의 시선 속에서 성적 대상화로서 존재할 때 은근한 만족감을 느낀다. 심지어 삶의 의욕과 함께 전에 볼 수 없던 생동감을 느끼기도 한다.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장마르크를 만나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근원적인 슬픔과 죄책감은 발목에 달린 모래주머니처럼 무겁게 매여 있다. 장마르크는 그런 그녀에 대해 ‘부역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굳이 정치적 용어를 빌리자면 부역자다. 혐오하는 권력에 자신을 동화하지는 않으면서 권력을 이용하고 권력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위해 일하고 어느 날 재판관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자기에겐 두 얼굴이 있다고 핑계를 댈 부역자.”


샹탈을 뒤덮고 있는 ‘모순’은 그녀를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샹탈을 규정하는 진짜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녀의 욕망과 상처를 걷어내면 무엇이 남을까? 잘 모르겠다. 이걸 누가 판단해줄 수 있을까? 그저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샹탈을 나타내는 정체성의 일부일 수도 있다. 장마르크가 본 해변에서의 샹탈, 직장인으로서의 샹탈, 그리고 이름 모를 연서를 받았을 때의 샹탈이 낯설었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그녀의 일부였듯이. 어쩌면 인간의 정체성은 전부 모순적이며, 또 그렇기에 모호하지 않을까. 타인이 규정한 ‘나’와 내가 생각한 ‘나’가 완벽히 똑같을 수 없다. 어느 것이 진짜라고 정의할 수도 없다.


나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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