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언어 예술 | 뉴노멀 다이어리 1. 2022년 봄
[우정의 언어 예술 | 뉴노멀 다이어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성찰한 시각 예술교육실천가의 일상 속 사유와 예술적 실천 과정을 기록한 에세이입니다.
뉴노멀의 균열 사이로 : 바이오필리아
내가 바이오필리아(Biophilia)를 알게 된 것은 작년 봄이었다. 당시 나는 몇몇 문화예술교육사들과 실기연구모임을 하고 있었다. 모임에서는 서로 돌아가며 실기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한 선생님께서 석사 논문 주제였던 바이오필리아 개념을 소개해주셨다. 그리고 해당 개념이 건축 디자인에 적용된 예시를 보여주셨는데, 이제 갓 식물 집사가 된 나에게 흥미로운 디자인들이 많아서 더 관심이 갔다.
나는 우연한 계기로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시작된 그 해에 그림책 전시를 했는데, 축하하러 온 지인들이 포인세티아와 문샤인, 그리고 알로카시아를 선물해주었다. 처음엔 선물해준 마음이 고마워서 때에 맞춰 물을 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매일 아침 일어나 식물들을 살피다 보니 이파리가 시들면 걱정이 되고, 너무 미안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매일 아침 식물들의 안부를 살피고 새 이파리와 꽃을 피운 식물을 보면 사진을 찍어 지인들에게 자랑을 하고 있었다. 생명을 기르는 기쁨은 이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설렘이었다. 주말에는 집 근처에 작은 텃밭을 가꾸면서 임시보호 중인 강아지 사랑이와 함께 주말마다 텃밭으로 산책을 가고, 가지, 고추, 상추, 치커리 등을 수확해와서 손수 밥을 지어먹었다. 뉴노멀의 균열 사이로 생명들의 자리가 생기고 있었다.
양철 로봇의 마음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을 조금씩 터득해가는 과정에서 소개받은 바이오필리아는 나뿐만 아니라 코로나를 겪고 있는 세상이 관심을 갖는 주제이기도 했다. 2020 트렌드 키워드로 바이오필리아가 언급되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도 개관 5주년 기념 레지던시 결과 전시의 주제를 <바이오필리아, 흙 한줌의 우주>로 정하는 등 세상도 자연을 사랑하는 감각을 깨우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바이오필리아 흙 한줌의 우주> 전시 서문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바이오필리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온라인 전시)
바이오필리아(Biophila, 생명사랑), 다소 신성하게 들리기도 하는 이 단어는 환경 파괴로 인한 재해와 감염병의 대유행에 크게 위협받고 상처받은 지구 생명을 위한 여망입니다. (중략) 오만하게도 인간과 자연계를 이분했던 인류는 우리 안에 내재된 바이오필리아를 깨우치고 지구 공생을 위한 윤리관과 태도를 가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후략)
이 글은 코로나 이후의 인류가 지향할 가치가 ‘무한경쟁에서 균형으로, 고립된 인간에서 상호의존적인 인간으로, 파괴적 인류세에서 창의적이고 평화로운 인류세로 변화의 발걸음을 내딛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리고 내가 바이오필리아를 이해하는 과정은 마치 오즈의 마법사(Wizard of OZ)의 양철 로봇(Tin Man)이 마음을 찾으러 떠나는 여정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양철 로봇 닉(Nocholas Chopper)은 마음을 찾기 위해 도로시 일행과 함께 오즈로 향하는 캐릭터이다. 닉에게는 양철 몸이 되기 전에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마녀의 저주로 양철 몸을 갖게 되자 사랑도 잃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쉼 없이 일만 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닉은 관절이 녹슬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에야 일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나.'라는 질문에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얻은 닉은 관절에 기름을 뿌려준 도로시와 함께 마음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산업화와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를 이끈 현대인은 생산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왔다. 이에 따라 무한경쟁과 고립된 인간과 파괴적 인류세라는 반작용을 얻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사랑하는 마음'을 경험하지 못해 슬픈 생명들을 마주하는 상황이 되었다. 코로나19가 지구를 잠식해버린 시점에 우리 모두가 멈춘 것은 녹슬어버린 닉에게 찾아온 사유의 시간과 비슷해 보인다. '우리는, 지구는, 나는 왜 이렇게 고장나버렸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의 오류를 찾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유의 중간점에 '바이오필리아'를 만났고, 이제 막 도로시와 함께 마음을 찾아 떠나는 닉의 마음으로 예술교육실천가로서의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이다.
함께, 오래 살기 위한 공존의 몸짓
바이오필리아를 마음에 새기고 한 해를 지냈다. 2년 만에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게 된 봄은 그 어느 때보다 생명력이 넘쳤다. 생동하는 봄을 만끽하는 내 마음을 바이오필리아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점점 선명해지는 마음을 잘 알기 위해 계속 공부를 이어갔다.
바이오필리아는 생물학자인 애드워드 윌슨이 소개한 개념으로, 그는 인간의 유전자에는 바이오필리아 즉, 생명 사랑의 본능이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개와 고양이를 보며 느끼는 호감이나 관심, 산과 공원 같은 자연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감정 등이 바이오필리아로부터 기인한 생명 사랑의 본능의 대표적인 예’라고 소개한다.
지난봄부터 일 년 간 내 마음속에서 충분히 자라난 바이오필리아는 나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이끌어가는 것 같았다. 산책 길에 어린 까치와 고양이, 하루하루가 다르게 피어나는 꽃들을 만나면 개미굴 앞에서 연신 감탄을 내뱉는 아이처럼 인사를 건넸다. 봄이 무르익는 모습에 탄성을 더 자주 내뱉을수록 내 주변에 살고 있는 생명들과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어졌다. 이런 바람을 담아 이따금 방콕의 아티스트 샌드(Sand Suwanya)의 스튜디오에서 만든 천연물감으로 태국 여행에서 만난 고양이들을 그리면서 봄을 보냈다.
나는 이 그림을 모아 5월에는 실기연구모임 선생님들과 함께 전시를 했다. 전시는 <실패가 없는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서울문화재단의 청년예술청 화이트룸에서 이틀 동안 열렸다. 우리는 이 전시를 위해 3년 동안 온라인으로 꾸준히 만나 여성이자 창작자, 예술교육실천가로서 지키고 싶었던 가치를 차곡차곡 모았다. 나는 그림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과정까지 자연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며 실험했던 지구색 물감 만들기 도구도 함께 전시했다. 전시를 준비하며 자연과 생명을 화지에 옮기기 위해 흙, 돌, 풀에서 가져온 재료로 물감을 만들고, 그 물감을 붓질을 해온 과정까지가 모두 ‘공존을 위한 몸짓(A gesture of coexidence)’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가는 일상과 창작하는 행위가 적어도 생명을 훼손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기를 바라며 벌새와 같이 ‘보잘것없고 나약하게 느껴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지키며 살고 싶다고 한번 더 다짐했다. 내 안에 싹을 틔운 바이오필리아가 어디까지 자랄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