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프롤로그 : River Lane과의 만남 그리고 20일간의 여행
2023년 8월, 20년간 이끌어온 IT기업의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던 날, 나는 오래된 기타 케이스를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1997년부터 2023년까지, 여러 회사를 설립 운영하며 대표이사라는 무거운 타이틀을 달고 살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음악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깊은 밤 모든 업무를 마친 후 스튜디오에 혼자 앉아 곡을 쓰고, 주말이면 가사에 매달렸다. 음악감독이자 작곡가, 작사가로서의 꿈을 품고 살았지만, 현실은 항상 바빴고 급했다.
어릴 적부터 글재주가 좋았던지 여러 차례 상을 받기도 했지만, 언젠가부터 펜을 놓게 되었다. 비즈니스 문서와 이메일로만 채워진 일상에서 창작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내게 전환점이 찾아온 건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오랜 스트레스와 무리가 쌓이면서 몸 곳곳에 이상 신호가 나타났다. 2년 간 4차례의 수술. 병원을 오가며 진단받고 치료받는 과정에서, 나는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이 세 가지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민했다. 해야 하는 일은 명확했다. 회사를 운영하고, 직원들을 책임지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 할 수 있는 일도 있었다. 26년간의 경험으로 쌓은 사업 노하우와 여전히 작동하는 음악적 감각들.
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었을까?
2023년 9월, 모든 것을 정리한 후 나는 긴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도, 기간도 정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의 질문만 들고 길을 나섰다.
"이제는 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 수는 없을까?"
26년간 억눌러왔던 음악가의 꿈, 어린 시절 가졌던 작가의 꿈, 그 모든 것들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나이도 들고, 몸도 예전 같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절실했다. 남은 시간을 진짜 내가 원하는 일에 쓰고 싶었다.
유럽의 작은 항구 도시에서 나는 그 답을 만났다.
우연한 만남, 필연적 대화
해변가 작은 카페에서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던 어느 오후였다. 26년간 쫓기듯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그저 존재하는 것'의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한 남자가 기타를 꺼냈다. 비싼 악기였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모래사장에 앉아 연주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소프트 록을 연상시키는, James Taylor나 Carole King 같은 따뜻하고 성숙한 멜로디였다.
음악가로서의 직감이 발동했다. 이 사람, 보통이 아니다.
"좋은 곡이네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었다. 60대 초반쯤, 평범해 보이지만 눈빛에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감사합니다. 오래된 제 곡이에요."
영어였지만 억양이 독특했다.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닌 사람의 국적불명 발음이었다.
"직업이 뮤지션이신가요?"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쓸쓸하게 웃었다.
"한때는 그랬죠."
그 대답에서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한때는'이라는 말 속에 담긴 복잡한 감정들을. 나 역시 '한때는 음악가를 꿈꿨던 사업가'였으니까.
해가 질 때까지 이어진 대화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나눴다. 그는 자신을 'River Lane'이라고 소개했다. 본명이 아님은 분명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여행자들 사이에는 그런 불문율이 있다.
"저도 목적 없이 떠돌고 있어요. 함께 가시겠어요?"
내가 먼저 제안했다. 오랜만에 만난 진짜 음악가, 그리고 나와 비슷한 무언가를 품고 살아온 듯한 이 사람과 함께라면 분명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좋죠. 저도 오랫동안 혼자였거든요."
그렇게 우리의 20일간 동행이 시작되었다. 두 명의 전직 뮤지션이, 각자의 상처와 꿈을 품고 떠나는 여행이었다.
River Lane은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달랐다. 작은 마을의 카페에서 연주할 때, 호텔 방에서 허밍으로 멜로디를 만들 때,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3일째,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전 한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했어요. 수만 명이 제 이름을 외치고, 제 노래를 따라 부르는...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지금은 왜 그만두셨어요?"
"피곤해서요. 정확히는, 그 모든 게 가짜 같아서요."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감이 배어있었다.
나는 내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26년간 IT 사업을 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한 음악에 대한 꿈, 몸이 아프면서 깨달은 인생의 유한함, 그리고 이제야 찾은 용기에 대해.
"결국 우리 둘 다 음악 때문에 여기 있는 거네요."
River Lane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음악에서 도망쳐 나왔고, 당신은 음악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일주일이 지나자 River Lane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작은 민박집에서 밤늦게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그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 순간 나는 전율했다.
화려한 무대도, 완벽한 음향 장비도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고대의 음유시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로 들려주는 것 같았다.
'이런 재능을 왜 묻어두고 있을까?'
다음 날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음악은 세상에 나와야 해요. 당신이 싫어하는 상업적인 방식이 아니라, 당신만의 순수한 방식으로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전 이제 그런 거에 관심 없어요. 그냥 이렇게 조용히 살고 싶어요."
"그럼 제가 해보면 안될까요? 26년간 사업가로 살면서도 놓지 않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는 일을요."
20일의 여행이 끝나는 날, 우리는 처음 만났던 해변 카페에 다시 앉아있었다.
"고마웠습니다."
River Lane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걸 기억하게 해줘서요. 음악이 뭔지, 진짜 소통이 뭔지..."
"저야말로 고마워요. 제가 찾던 답을 만났으니까요."
나는 진심이었다. 이 여행을 통해 나는 확신했다. 이제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일치시켜 살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언젠가 당신의 음악을 세상에 들려주겠다고. 그리고 저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겠다고."
"제 이름은 절대..."
"물론이죠. River Lane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요."
그는 긴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1년 후에 하세요. 그때쯤이면 저도, 당신도 준비가 될 것 같아요."
"2024년이면... 제가 진짜 음악가이자 작가로 새 출발하는 해가 되겠네요."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24년, 나는 그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작곡가 피디스티브오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와 작업을 시작했다.
River Lane이 들려준 10개의 이야기를 하나씩 곡으로 만드는 작업. 동시에 오랫동안 놓아두었던 펜을 다시 들고 이 모든 이야기를 글로 기록하는 일.
"A Few True Friends"는 성공 후에 느낀 인간관계의 허무함을, "Quiet Moments"는 바쁜 일상 속에서 잃어버린 고요함을 그렸다. "When You Left"는 갑작스런 이별의 아픔을, "Moving Day"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을 담았다.
모든 곡에는 그의 이야기가, 그리고 동시에 26년간 사업가로 살면서 억눌러왔던 내 이야기가 녹아있었다.
이제 이 노래들을 세상에 내놓을 시간이다. River Lane이라는 가수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어딘가에서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26년 만에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 시작했다. 음악감독이자 작곡가, 작사가로서, 그리고 다시 글을 쓰는 작가로서.
이 이야기는 River Lane만의 것이 아니다. 중년의 어느 시점에서 진짜 자신을 찾아 떠나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음악은 가수의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것이에요. 제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노래를 듣고 위로받는 사람이 중요한 거죠."
River Lane이 떠나던 날 남긴 말이다. 이제 그 음악들이 세상과 만날 시간이다.
*River Lane의 음악 일기 'Quiet Conversations', 그 첫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By 공감아티스트 오지훈. 202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