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어떤 형이 동생에게 말한다.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딱 나까지만 태어나고 끝이 났어야 했는데..."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한다.
"너는 내가 아니면 이 세상 구경조차 할 수 없었을 거야. 그러니 아빠 말 잘 들어"
어떤 사람은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같은 놈을 낳고 네 엄마는 미역국을 먹었겠지?"
어떤 남자는 여자를 비하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제일 마지막으로 만드신 게 바로 여자야. 제일 하찮은 존재라는 뜻이지"
여기까지 보면, 이렇게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안 태어나도 될 것 같고, 마치 우연히 태어난 존재처럼 여겨진다.
마치 그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어도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잘것없는 존재로 회자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위에 언급된 당사자가 이런 말을 어릴 때부터 평생을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라.
이는 자존심을 바닥으로 내 팽개쳐지는 일일 뿐 아니라, 스스로 매우 무가치한 존재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일 것이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존재론적인 평등을 가지고 있다.
한 때 북한 기자와 남한 기자가 만나 토의를 한 적이 있었다.
북한 기자가 말하기를,
"남한 기자 동무들, 제발 우리 존엄에 대해 글을 쓸 때 함부로 폄훼하지 말라우. 우리 북조선 주민들이 동무들 글이 쓴 존엄에 대한 글을 읽으면 충격을 받는단 말이오. 우리 존엄에 대한 존경을 표해 달라 말이오."
이런 말을 들은 남한 기자들은 난감했다.
그래서 어느 기자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네 나라에선 존엄이 한 사람 밖에 없지만, 우리나라에는 5천만 명이 다 각자 존엄이거든..."
맞는 말이 아닌가?
위인전이나 영웅전을 보면, 그 주인공은 다른 사람과 존재가치가 다른 것으로 묘사되기 십상이다.
영웅이란 나라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하여 그 시대에 그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 나라가 세워질 수도, 존속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 후손조차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그런 특별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그 영웅에 대한 신화화가 진행된다.
누구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둥,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둥 등의 신화화 작업 말이다.
그런 신화화는 그런 영웅의 탄생을 필연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진행된다.
그 결과 세상에는 필연적 존재인 영웅이 있어 그 영웅들이 우연한 존재인 뭇 백성들을 다스리거나 위기상황에서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그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에 기록되고 또한 동상을 만들어 우상화작업까지 진행한다.
현대는 나라를 세울 일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영웅도 필요 없는 시대이다.
그 대신 모든 사람이 다 '나'라는 나라를 세우는 영웅이 되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오늘날의 <영웅>이란 가장 나답게 사는 사람, 나만의 고유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오늘날에도 엄마들이 직접 자기 자식들에 대한 신화화는 여전히 진행된다.
그것이 바로 태몽이다.
"내가 너를 임신했을 때 내가 이런 꿈을 꿨단다"
자신을 잉태할 때 엄마가 꿨던 꿈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녀는 기분이 좋다.
그 이유는, 엄마의 태몽이 내 존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태어나야 할 필연성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아이는 이런 생각과 더불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뭔가 남다르게 살 궁리를 하게 된다.
거기다가 아기가 태어나면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준다.
그 이름은 대개 엄마가 태몽으로 부여한 존재 필연성에다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되겠다는 사명감을 더해준다.
얼마 전 나의 내담자 중 한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이야기했다.
어느 주말 아내가 외출하고 돌아와 보니 아버지와 아들이 한판 붙어 냉기가 흘렀다.
거실 소파에 앉아 뚱~해 있는 남편은 하릴없이 애꿎은 TV 리모컨만 이리저리 돌리지만 눈은 120도 각도로 굴리면서 분노를 못 참고 있었다.
아들방을 들여다보니, 아들은 아들대로 침대에 돌아누워 엄마와도 눈을 맞추고 싶어 하지 않는다.
급기야 남편은 리모컨을 집어던지며 아내에게 화풀이한다.
"아들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아빠 말을 저렇게 안 듣느냐"
화의 목표를 아들에서 아내로 바꾼 것이다.
사태 파악을 해 보니, 아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하루 종일 게임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아니, 얘가 전교 10등 했으면 공부를 나름 잘하고 있는 건데, 주말에 스트레스 풀게 게임하도록 좀 놔두지 뭐 그런 것 가지고 부자가 싸움을 하느냐?"
라고 남편에게 따졌다.
남편은,
"당신이 그렇게 감싸고도니까, 애가 저렇게 아빠 말을 안 듣고 방자해지고 있는 거야. 오늘은 저놈이 나한테 대들기까지 하더라고. 지도 다 컸다고 이제 나한테 힘으로 밀어붙이더라고..."
고 1인 아들은 사춘기 들어서면서부터 아버지의 말씀을 거스르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두 사람이 수도 없이 부딪힌단다.
그 아들은 집에서 공부하다가도 친구가 부르면 언제든지 나갈 준비가 되어 있고, 시험 전날이라도 공휴일이면 친구들과 놀이동산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니 성공지향주의자인 아버지로서는 미칠 노릇이다.
아버지의 주장은 아들이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전교 1등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아버지 말을 안 들으니까 저렇게 늘 전교 10위권에서 논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면, 하려고 했던 것도 안 하려고 하고, 오히려 아버지가 말하는 그 반대로 한다고 한다.
나는 나의 내담자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첫째, 아버지의 잔소리는 지금 아들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감정까지 다 빼앗아 가고 있다.
둘째, 아버지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어, 아들의 인생을 아버지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셋째, 아버지는 지금 10대는 아버지의 인생과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넷째, 아버지가 아들에 대한 존중이 없으면 앞으로 아들은 아버지와 대화를 단절할 것이다.
지금 10대는 아버지 세대의 유교적 사고 내지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어떻게 바꿀 수 있는 세대가 아니다.
부모는 자신이 아날로그 세대라면, 10대 자녀는 디지털 세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북한의 김정은도 지금 10대는 우상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골치 아파하는 중이라고 한다.
지금 10대는 아버지대와는 시대정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지금 10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마땅한가?
부모세대는 지금 10대에 대해서는 완전히 거꾸로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 지금 10대이다.
거꾸로 생각한다 함은, 지금까지의 가부장적 제도의 개념으로 <부모-자녀의 존재 질서>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반대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이론적 배경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맞는 말이다.
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대적 사고에는 두 가지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기독교 교리 중 하나인 <예정론>이다.
기독교 교리 중 예정론으로 모든 상황을 보면 엄청난 궤변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 기성세대가 10대를 이해불가능한 세대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예정론>을 동원해서라도 이해하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한다.
예정론적으로 존재를 파악하면, 이 글의 처음에 나오는 <우연한 존재>는 이 세상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필연적 존재가 된다.
<우연한 존재론>에 의하면, 세대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존재 필연성이 줄어든다.
그렇지만 <예정론>으로 보면, 존재 필연성이 각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있다.
말하자면, 예정론이란 이런 논리이다.
"만세전부터 나의 구원은(탄생은) 예정되어 있었다"
라는 선언이다.
이렇게 보면, 나는 부모의 의지와 계획에 의해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생각할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 위해 엄마 아빠가 태어났어야 했고, 아빠가 태어나기 위해 할아버지 할머니가 태어났어야 했고, 엄마가 태어나기 위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태어났어야 했고...
이렇게 계속 올라가야 한다.
이렇게 보면, 나의 존재 필연성은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
성경 히브리서 7장 11절에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레위는 태어나기 전 세 세대(아브라함-이삭-야곱-레위) 위의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레위가 태어나 제사장 지파인 레위지파를 형성하기 위해 레위의 씨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이미 있었다는 말이다.
둘째, 프랑수와즈 돌토이 말하는, 주체의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이론이다.
가부장적 질서에 의하면, 사람이 태어나야만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돌토는 그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주체가 타자를 위한 가시적 대상으로 물질화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주체의 욕망이다."
돌토의 주체개념은 데카르트의 근대적 주체개념을 뒤집어 놓았음에 틀림없다.
내 친구 중에 마마보이가 있다.
어머니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아들이다.
결혼을 했는데, 어머니가 신혼여행까지 따라와서 신혼 첫 날밤부터 세 사람이 한 침대에서 잤다.
물론 그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갈라놓기 위해 두 사람 사이에서 잤다.
<아들 - 어머니 - 며느리> 침대 위에서 3자 구조는 신혼 6개월 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어느 날, 친정에서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친정에 큰일이 발생하여 어머니는 친정을 다녀와야만 했다.
그들 부부는 어머니가 친정에 간 날에야 겨우 첫날밤을 보낼 수 있었다.
어머니가 부재하는 3일 동안 열심히 작업을 했지만, 그 기간은 아내가 생리를 끝낸 지 며칠 되지 않아 가임기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3일 동안의 부부 관계로 아기는 잉태되었다.
아이의 주체가 가지고 있는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강했으면,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엄마의 난자와 만나기를 죽음의 욕망을 넘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내가 직장에 다닐 때의 일이다.
내가 직장에 다닌 지 3년 만에 신입 조수를 받았다.
그에게 물려준 업무 중 하나가 거래처를 매일 다니면서 서류 교환을 하는 일이었다.
그는 거래처 여직원과 눈이 맞아 연애를 하였고, 급기야 임신까지 시키고 말았다.
이 사건을 돌토의 입장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그 아이의 주체는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주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아버지가 어머니를 유혹하게 만들었고, 어머니는 기꺼이 아버지의 유혹을 당하게 만들었다.
그 어머니는 이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였고, 위로는 3살 위 언니, 5살 위 언니, 7살 위의 오빠가 있었지만 모두 미혼이었다.
그 여직원의 집안으로서는 가장 막내가 가장 먼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 아이의 주체는 어머니가 온갖 수모를 겪어가며 결혼하게 만들었고 결국 이 땅에 당당한 존재로 태어나게 되었다.
그 아기의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버지-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였고, 육체적인 결합까지 이끌었으며, 온갖 수모를 겪으며 결혼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게 했다.
어떤가?
<예정론>에 입각한 해석이!!
이렇게 돌토의 주체 관점에서 보면, 어느 부모도 자녀를 함부로 대할 권리는 없어 보인다.
부모는 자녀를 예속화시키지 않고, 일방적으로 이끌어 가지 않아도 자녀는 스스로 자기답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해 갈 것이다.
내 자녀는, 부모가 보기에 '내 자식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자녀가 가지고 있는 존재 욕망은 부모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출해 가도록 신이 그렇게 주체를 만들어 놓았다.
부모로부터 자유로운 자녀, 자녀로부터 자유로운 부모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남자가 여자를 대할 때도 <존재>로 존중해야 마땅하다.
가장 하찮아서 가장 늦게 창조한 것이 아니라, 창조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로서 여자를 창조하였다.
퍼즐을 맞춰 가는 중에 마지막 조각이 없다면 어떻겠는가?
퍼즐을 맞춰본 사람이라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