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식,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

구강기와 항문기 사이 전-초자아(pre-superego)

돌토의 전-초자아(pre-superego)


프랑수아즈 돌토(Francois Dolto)는 프랑스의 심리학자이며, 전-초자아(pre-superego)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전-초자아는 초자아(superego)의 전단계이며, 어린 시기의 아동이 자신의 부모나 주변 성인들의 가치관과 규범들을 내면화하고 수용하면서 형성된다.

항문기 단계에서 아이는 초자아가 형성되기 전에, 자신의 욕구와 충동을 제어하고 규제하는 방법을 학습한다.

돌토는 이러한 전-초자아가 아동의 발달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아동은 초기에 자신의 욕구와 충동을 제어하기 위해, 부모나 주변 성인들의 요구사항을 수용하고 따르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아동은 자신의 행동과 욕구에 대한 규제를 내면화하게 된다.

전-초자아는 초자아와 달리, 아동이 내면화한 부모의 가치관과 규범들이 아직 완전히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아동은 전-초자아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만의 개인적인 가치관과 규범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이러한 개인적인 가치관과 규범은 나중에 성인으로 성장하면서도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결론적으로, 전-초자아는 아동의 발달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이다.

아동이 자신의 욕구와 충동을 제어하고 규제하는 방법을 학습하며, 동시에 자신만의 개인적인 가치관과 규범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이러한 개인적인 가치관과 규범은 아동이 성인으로 성장하면서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며, 개인의 성격과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이는 초자아를 만들기 전, 즉 3세 이전에는 상징계 언어가 아닌 상상계의 언어를 사용한다.

아이는 초자아 직전의 전-초자아는 말을 상상계에 사용하던 말을 잃지 않기 위해 분신을 만들어낸다.

아이는 분신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아기 자신과 자신을 돌보는 엄마와 리듬과 정서, 시간을 일치시키면서 전-초자아를 만들어 낸다.

아이마다 고유한 신체리듬과 생체시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리듬과 시간을 아이를 돌보는 사람의 그것과 일치하게 되면서 두 사이에 코드화된 언어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전-초자아이다.

만일 생애 처음부터 엄마가 아이의 신체 리듬과 생체시계를 인정하지 않고, 엄마 자신의 리듬과 시간을 강요하면, 말하자면 아기가 원할 때 젖을 주지 않고 물리적 시간에 맞춰 젖을 먹인다면, 아이는 자신의 신체리듬과 생체시계를 없애는 대신 심각한 장애(불면증, 거식증, 정신병)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옹알이가 아기의 고유한 신체리듬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엄마의 음소들을 흉내 낸 것이다.

옹알이는 엄마가 발음할 수 있는 모든 음소들 중 아기가 흉내 낼 수 있는 것들을 뽑아내어 나머지는 삭제해 버린 후, 아기의 인두로 발음할 수 있는 음소인 것이다.

아이는 엄마의 발음법을 따라 하려고 계속 노력할 것이고, 보호자의 가청 주파수에 익숙해질 것이다.

이런 노력으로 아이는 다른 언어의 악센트나 음소들, 진동수와 멀어지게 될 것이다.

아이의 초기 발달과정(구강기, 항문기)에서 자신이 접하는 세계를 엄마 중심으로 재편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바로 전-초자아의 역할이다.


돌토는 [자기를 찾는 아이들] 제17장에서 전-초자아를 이해시키기 위한 중요한 예를 든다.


아주 정확한 예를 들어봅시다. 20개월 된 아이가 벽장에 있는 물건을 모두 꺼냅니다. 아이는 자신이 바보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계속 "만지면 안 돼,안돼,나빠”라고 하면서도 그런 행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전-초자아가 개입된 것입니다. 어머니의 말을 따라 하는 아이의 말속에 전-초자아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약하게 나타나 이 아이가 아주 발전적인 욕망의 행위를 끝까지 계속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이 욕망의 행위,족 엄마 벽장의 것을 모두 비우는 행위는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 있는 것,즉 자기 자신의 유일한 주인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전-초자아의 두 단계 충동


전-초자아는 두 개의 성감대, 구강충동과 항문충동으로 나눈다.

구강충동은 본능 충족을 위한 욕구와 관련된다면, 항문충동은 배변훈련 과정에서 금지와 관련된다.

항문충동의 금지는 오이디푸스 시기의 금지와는 다르다.

돌토는 항문충동의 금지를 표현할 때, 상어, 물고기, 늑대 호랑이, 사자 같이 말을 할 줄 모르는 존재들을 통해 표현한다.

그것은 또한 금지하는 치아와 관련된다.

말을 안 들으면 확 물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양손을 감춘다.

가령 아이가 먹지 못하게 금지된 케이크를 너무나 먹고 싶어 한다고 치자.

아이는 케이크 쪽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자기 손이 케이크를 잡지 못하게 그리고 케이크를 떠올리면서 자신의 입이 손을 물지 않게 양손을 얼른 등 뒤에다 숨긴다.

이렇게 전-초자아는 아이를 만족시키는 기능적 신체 이미지를 단호하게 갈라낸다.


이전 단계의 성감대,즉 입에서 형성된 전-초자아는 아이를 두 부분으로 분할한다.

즉 욕망하는 부분 그 아이에게 구강 충동으로 남아 있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금지되어 온 항문충동 실행으로 분할되는데 구강충동과 항문충동을 연결하는 양손은 절단위협을 받고 있다.

다름 아니라 구강 성감대에 의해,즉 욕망된 대상에 따라서 이미 완료된 단계에 속하는 성감대에 의해 분할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주체가 바라기 시작하면 그의 두 눈은 케이크를 주시하게 되고 입 속에선 침이 고이기 시작하면서 감각적으로 그는 욕망하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 욕망(행위와 관련되기 때문에 항문 리비도에 속하는 욕망, 즉 항문충동)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행동이전 단계의 성감대(상어,물고기,늑대,호랑이,사자와 같이 말을 할 줄 모르는 존재들로 표현됨, 구강충동),즉 침을 흘리던 입(치아)에 의해 금지된다.


이전 단계의 성감대(입, 항문)로 형성된 전-초자아는 아이를 두 부분으로 분할한다.

즉 욕망하는 부분 그 아이에게 구강 충동으로 남아 있는 것과 그가 지금까지 금지되어 온 항문충동 실행으로 분할된다.

두 충동을 이어주는 양손(양손은 구강충동을 채우기 위해 먹는 일과 항문충동을 마무리하기 위해 똥을 닦는 일을 한다)은 절단위협을 받는다.

다름 아니라 구강 성감대에 의해,즉 욕망된 대상에 따라서 이미 완료된 단계에 속하는 성감대에 의해 분할되는 것이다.

손은 구강과 항문을 연결하여 동물과 달리 인간다움을 만들어 내는 문화적 상징성을 가진다.

이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절단위협을 하면, 양손을 감추고 눈치를 보게 되며 건강한 도덕성이 발달하기 어려워질 뿐 아니라, 내면에 분노를 쌓게 만든다.

이 상태는 자신의 욕망을 말할 수 없는 상태이며, 현실에서 늘 이 상태로 퇴행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탐욕스러운 입의 형태는 여러 단계들을 뛰어넘는 것의 금지를 나타낸다.

이 입은 이들의 꿈속이나 아이가 금지된 행위를 하고 싶어 하는 상황에서 객관화된다. (이상 [자기를 찾는 아이들] 프랑수아즈 돌토, 제17장)


항문충동의 금지/거세


나의 누님은 어머니가 자기 집을 방문할 때면 양념된 깻잎을 자주 싸 오셨다고 한다.

한 번은 어머니가 싸 오신 깻잎을 밥상 위에 올린 후 밥을 먹는 중에 이 누님이 젓가락으로 깻잎을 집는다는 것이 두장이 집어서 숟가락으로 퍼놓은 밥 위에 얹었다.

그때 어머니 왈,


"한 장만 먹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누님은 화가 확 올라왔다.

어릴 때부터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시절, 늘 엄마의 눈치만 보고 좋은 것은 아버지 상에만 올리고 감히 손을 대지 못했던 시절이 떠오르면서, 내가 아직도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밥을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깻잎 사건은 누님으로 하여금 구강충동과 항문충동이 겹친 음식 규범에 얽힌 금지를 풀어가게 했다.

누님은 어머니의 그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깻잎을 일부러 두장씩 먹었다.

어머니의 금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이다.


누님의 그런 금지해제의 효과는 그것을 지켜보는 내게도 유효했으리라 싶다.

전에 올린 글([펑크 똥꾸])에서 <상과 밥상>에 대해 언급했다.

같은 상 위에서도 아버지가 먹는 반찬과 다른 식구들이 먹는 반찬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던 나는 눈치 없이, 항문충동 금지를 모른 채 마구 경계를 넘어 아버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나는 한동안 눈치가 없었다.

어느 순간,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게 되는 순간 나의 손은 상어의 이빨에 잘려 나간 듯이 상(아버지의 반찬)과 밥상(모두의 반찬)을 가르는 경계선 안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러한 항문충동 금지 내지는 거세는 그렇게 건강하지 못한 초자아, 즉 건강한 도덕성이 아니라 눈치 보는 전-초자아로 형성된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그 선을 넘어설 때면 아버지의 표정이 바뀌기 전에 어머니의 표정이 먼저 변했다.

나는 어머니의 표정에서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경계선이 내게는 전-초자아였다.

돌토의 말대로, 전-초자아는 손이 금지되는 것이다.

즉, 전-초자아는 입과 손 사이의 관계를 끊어 놓는 것이다.

손이 원하는 것을 집어서 입으로 마음껏 가져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먹고 싶은 것을 억압해야 했고, 그 결과 나는 식충이가 되어야 했다.

전초자아의 눈치 윤리와 탐식


나의 바로 위의 형은 당시 '재생불능성 빈혈' 환자였다.

나의 부모님은 가정의 분위기를 이 형 중심으로 몰아갔다.

당시 불치병을 앓고 있던 형이었기에 가정의 분위기는 늘 우울했다.


내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맛들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1963년도에 대한민국에서 라면이 처음 출시된 <삼양라면>의 맛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부모님이 형에게는 마음껏 먹도록 했지만, 내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형은 내게 단 한 젓가락의 라면을 먹여줬다.

내가 퍼 먹은 것이 아니라, 내 손은 라면을 집기에 금지되었고 형이 젓가락으로 집어 주는 그 한 입을 먹을 수 있었고, 단 한 숟가락의 국물을 먹을 수 있었다.

그 라면의 맛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이 되었다.

요즘 어떤 값비싼 라면도, 고급스럽게 만든 생라면도 그 라면의 맛을 따라잡을 수 없을 듯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안타까운 부분은, 내가 직접 젓가락을 저어서 라면을 집어 보지 못하고, 내가 직접 숟가락으로 국물을 퍼 먹어보지 못하고 형이 주는 대로밖에 먹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나의 항문충동이 거세당하여 나는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형에 대한 편애는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중학교 3년 때 형의 재생불능성 빈혈은 재발하였다.

중학 시절에 내게는 가장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나와 형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는 중에, 길거리에서 갑자기 어머니가 나를 세워 두고 '여기서 꼼짝 말고 있으라'라고 한 후에 어머니는 형과 유유히 사라졌다.

어머니와 형은 20분 후에야 나타났다.

형의 입에서는 짜장면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돈이 없어서 형에게만 짜장면을 사 먹이고 나오신 것 같았다.

지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나도 화가 났다.

그러나 나는 화가 낼 수가 없었다.

그때도 나의 손은 짜장면이 금지되고, 화를 낼 수 있는 손마저도 금지되었다.


몇 년 전 한 동안 나는 화곡동에 유명한 굴국밥집의 단골이었다.

어느 날, 굴국밥을 시켜 먹는데, 옆 테이블에서 아버지와 딸과 아들이 앉아 밥을 먹는데, 딸 혼자만 먹고 있었다.

내 느낌에는 아버지가 돈이 없어서 딸에게만 국밥을 사 먹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과거 짜장면이 생각났다.

그래서 내가 굴국밥 주인에게 몰래 가서 내가 저 아들의 밥을 사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굴국밥 주인은 '그러시는 것 아니라'라고, '상대방이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또 한 번 나의 손이 금지당했다.

두 손이 금지당했다는 것은 구강충동과 항문충동이 모두 금지당했다는 것이다.

음식을 대상으로 먹고 싶은 욕망과 저 음식을 내 똥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모두 금지당하는 가운데 눈치의 윤리를 가지게 된다.

그 당사자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참을 수밖에 없지만, 내면에는 분노로 채운다.

그 분노는 음식만 보면 끝장을 보고 싶은 것으로 보복한다.

그래서 그는 탐식, 게걸스럽게 먹을 수밖에 없는 무의식적 욕망에 노출된다.

음식을 집고자 하는 손의 행위를 금지했던 상어의 이빨이 나의 이빨로 장착되어 거침없이 먹어대는 강력한 이빨로 변모해 가는 것이다.

이빨의 충동(구강충동)과 손의 충동(항문충동)이 결합하여 야생동물의 이빨로 과거에 나를 외면한 음식에 보복을 쏟아내는 것이다.

절단당한 두 손이 음식을 앞에 두면 부활하는 손이 되어 먹어대기 위해 두 손은 바쁘게 움직인다.


이처럼 무의식적 분노의 표현으로서 탐식이라면, 음식을 만드는 데 사용된 자원에 대한 존중뿐만 아니라 마음 챙김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가지고 식사에 접근하기 어렵다.

오직 구강충동과 항문충동이 눈치의 윤리로 작동한다면, 귀한 음식을 먹을 때 소중한 자원에 대한 감사와 그 음식을 함께 나누는 타인과의 정서적 관계를 더욱 공감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음식에 대한 탐식과 게걸스럽게 먹는 방식에 노출되어 있다면, 그는 우선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에 이런 방식으로 노출된 결과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분노와 음식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과 자신을 내면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내면을 탐구하는 노력이 어느 정도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항문충동의 정서와 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