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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1): 존재 뿌리를 찾는 입양아s

존재 기원이 되는 흔적을 찾아 나서다


한인 입양아, 글렌 모리 감독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01/2019080100340.html

한인 입양아 출신 글렌 모리 감독, 세계 16곳 돌며 다큐멘터리 제작

"피붙이를 찾으려 애쓰는 것은 자기 정보 상실한 공통점 때문" 100번째 인터뷰 자기가 직접 해


전 세계 도시 16곳을 다니며 한인 출신 입양아 100명의 인터뷰를 카메라에 담았다. 1945년생부터 1995년생까지 나이도 천차만별이다. 타국의 언어가 모국어가 된 이들이 어디에서도 꺼내놓지 못했던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전시장에 설치된 아홉 화면에선 인터뷰 100편이 '기억' '성장' '조국' '만남'과 같은 아홉 가지 주제로 묶여 편집돼 나오고 있다. 2019 세계한인입양인협회(IKAA) 행사로 진행 중인 미디어 아트 특별전 '사이드 바이 사이드'. 작품명은 우리말로 '함께' 또는 '나란히'를 뜻한다.


"아주 중요하고 방대한 기록입니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이죠. 고아원에서 '함께' 살았던 입양아들이 이젠 전시장에서 '나란히'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31일 전시장인 서울 롯데호텔 에메랄드홀에서 프로젝트 제작자 글렌 모리(59) 감독을 만났다. 그 역시 한인 출신 입양아다. 1960년 생후 6개월 만에 미국 콜로라도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계속 살았다. "아주 사적인 기획이기도 합니다. 제가 100번째 인터뷰 대상자예요."


2004년 서울에서 열린 제1회 IKAA 행사에 참여해 세계 각국의 한인 출신 입양아들을 만난 게 계기가 됐다. 2013년 여름부터 아내 줄리 모리 감독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소셜미디어에 인터뷰 대상을 구한다는 글을 올리자마자 500여 명이 먼저 연락해 왔다. "내 이야기를, 내가 하고 싶다는 욕구를 많은 사람이 갖고 있었습니다. 부모, 배우자, 자식 등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마음속 이야기를 카메라 앞에서 하기 시작했죠."


2018년 5월, 한 시간 분량의 인터뷰 100편을 '사이드 바이 사이드' 프로젝트 홈페이지에 올렸다. 이들의 삶을 오롯이 재현하기 위해 편집은 최소화했다. 이후 원본을 활용해 다양한 작업물을 내놨다. 영상 설치 미술로 재가공된 이번 전시는 네 번째 변주다. 서울에서 첫 전시를 열고, 오는 9월 미국 뉴욕 워터폴 갤러리에서 5주간 전시한다.


모리 감독은 "입양아들에게선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와 무관하게 묘한 일관성이 보인다"라고 했다. 수백 명을 인터뷰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우리에겐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었다는 감각이 있어요. 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지요. 예컨대 비입양인들은 어머니한테 '내가 너 낳으려고 12시간이나 고생했어' 같은 말을 듣고 자랍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말을 들을 기회가 없어요.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버려졌는지 알려고 집착해요. 피붙이를 찾으려 애쓰는 것도 그 때문이죠."


그의 한국 이름은 '김강'이다. 그는 이 이름을 영어 이름 옆에 꼭 함께 적는다. "제 원래 이름이 뭔지 몰라요. 고아원에서 지어준 이름이거든요. 하지만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제 역사를 알려주는 이름이기 때문에 좋아요. 제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저와 비슷한 사람들 이야기를 꾸준히 하려고 합니다."


'김 진달래'라는 이름

(참조: [불안한 부모를 위한 심리수업], 졸저)


입양아들은 왜 자신을 버린 엄마를 꼭 찾고 싶어 하는 걸까? 그들이 자신을 버린 한국을 찾아 모국어를 잃어버린 죄책감의 표현인지 한국말을 더듬거려 가면서까지 ‘엄마’를 외치며 애타게 찾는 모습은 누가 봐도 눈물겨운 장면이다. 어떤 입양아는 자신을 버린 엄마를 만나 엄마가 만든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1971년 5월 서울의 한 경찰서 앞, 갓난아기가 바구니에 누워 울고 있었다. 그 아이가 진달래가 피던 계절에 발견되었다 하여 경찰들이 ‘김 진달래’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그 후 9개월 뒤 아기는 스웨덴의 한 가정에 입양되었다. 그녀는 성장 과정에서 ‘나는 왜 생김새가 다를까?’라는 정체성 고민을 끊임없이 했다고 한다. 그녀는 오히려 스웨덴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녀는 성장 과정에서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궁금증을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키워갔다. 그 결과 그녀는 스웨덴에서 국회의원직을 수행할 정도로 사회적 행보를 넓혀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예시카 폴피예르이다.


어머니가 저를 떠난 것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새로운 가치이자 삶이었습니다. 저는 스웨덴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녀는 스웨덴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녀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이후로 친어머니가 줄곧 생각났다고 한다.

그녀는


당신이 저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이 됐다면 저를 키우고 돌보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꼭 만나고 싶어요


라고 말한다.

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자식을 잘 키워내지 못한 어떤 엄마도 자신의 자녀들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다.

자신이 버려졌다면 분노를 해야 마땅한데, 오히려 자신을 버린 엄마를 용서부터 하고 무조건 보고 싶다고 말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NpjGrOG8tC4)


이런 장면을 지켜보노라면 가슴이 찡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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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자기 정체성일 것이다.

양부모 슬하에서 잘 자란 것, 국회의원이 되어 사회적 성공을 이룬 것만으로는 자기 정체성이 채워지지 않는 것일까?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동일성이 필요한데, 그녀는 존재의 기원을 이루는 부분에서 동일성이 끊겨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의 ‘동일성’을 확보하지 못하니까,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견고해도 뿌리 없는 수초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유아가 태어나 1년 동안 엄마의 품을 경험하면서 '나는 있다(I am.)'는 동일성을 확보한다.


콤파스에 연필을 끼워 동심원을 계속 그려나간다고 생각해 보자.

동일성이란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 내 존재의 중심점이다.

종이 위에 콤파스의 바늘로 중심점을 찍은 후, 동심원을 한없이 그려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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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카 폴 피에르는 자기 존재의 기원이 되는 중심점(동일성)을 찾으러 모국을 찾아왔다.

존재 기원을 찾는다는 것은 곧 생모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출생에 대한 자료가 남겨진 것이 없어 존재기원을 찾는 일에는 실패하였다.

존재기원을 찾는 일에 가장 근접한 단서로 자신이 바구니에 담긴 채 발견된 파출소에서 순경들이 지어 준 '김 진달래'라는 이름을 확인한 것만으로 자기 존재의 중심점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중심점 없이 그려졌던 원들이 그 이름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동심원으로 나열해 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뚜렷한 하나의 중심점, 존재기원을 이루는 중심을 찾지는 못하였지만, 희미하나마 존재의 중심점으로 삼게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아닌 경찰이 지어 준 이름이라 할지라도 그 이름은 최소한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동일성을 지킬 수 있는 최종적 보루가 될 것이다.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 욕망이 시작되는 기원을 찾는 중, 존재의 뿌리에 가장 가까운 한 지점을 찾았기 때문에, 그동안 느꼈던 존재의 수치심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머니를 찾지 않는, '클레멘트'라는 과학자

(출처: [Why] 2017.04.22, 재구성)


한국계인 클레멘트는 1956년 한국에서 입양됐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아들에게 외투를 입히고 모자를 씌운 다음 어디론가 한참 데려가더니 어느 길모퉁이에서 그를 세운 다음 와락 입을 맞추었다.


"이제부터 앞만 보고 가는 거야. 절대 뒤돌아보면 안 돼."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한참을 걸었다.

나중에 뒤돌아봤을 때 어머니는 없었다.

울 겨를도 없이 거리의 아이들이 달려와 그의 외투와 모자, 양말을 빼앗아 가버렸다.

그렇게 거리 생활이 시작됐다.


"어머니를 잃고 구걸하며 지낼 때 아이들이 달려들어 내 몸에 불을 질러 생긴 흉터죠. 보다시피 나는 튀기, 혼혈아였거든요. 내 친아버지는 아마도 미군 병사였겠죠. 당시 한국 사람들은 튀기를 경멸했어요. 지금도 생생해요. 아이들이 나를 보고 '튀기다! 악마야! 튀기는 불에 태워 죽여야 해!'라고 외치던 장면요. 어떤 아이가 팔에 휘발유를 부었고 다른 아이가 거기에 불을 붙였어요.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지르면서 팔을 접었는데 그 바람에 오히려 온 팔에 불이 붙었죠. 마침 지나가던 어른 하나가 황급히 옷을 덮어 불을 꺼준 덕에 겨우 살았죠."


"매일같이 아이들에게 얻어맞았죠. 살기 위해 매일같이 구걸했고 도둑질했고요. 아이들과 식당 뒷골목에서 종종 음식을 훔쳐먹고 다녔는데, 그때 하도 '가자!'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인지, 한국말을 다 잊어버렸을 때도 그 단어만큼은 뇌리에 남아 있더라고요(웃음)."


팔뚝을 불에 덴 지 얼마 되지 않아 클레멘트는 지나가던 감리교 선교사에 의해 충현보육원에 넘겨졌다.

1952년 10월 8일이었다.

이 날은 이후로 그의 출생일이 됐다.

보육원에서도 그는 차별받는 존재였다.

혼혈이라는 이유로 목욕물도 배식도 제일 나중에 받기 일쑤였다.

다른 아이들이 그의 목욕물에 똥·오줌을 싸놓는가 하면 한겨울에 덮고 있는 이불을 빼앗아 가버리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과 싸우다 걸리면 선생에게 여지없이 얻어맞았다.

머리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 1956년 일곱 살이었을 때, 미국 뉴욕에 있는 리처드와 준 클레멘트 부부에게 입양됐다.

미국 의회가 당시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고아를 미국인 가정으로 입양하는 법령을 통과시키면서 그가 '제1차 입양 대상자'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얼떨결에 비행기라는 것을 탔다. 24시간가량 날아갔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 들렸다. 거기가 어디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여객기 계단을 내려가자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나온 기자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그때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구나!" 새아버지 리처드 클레멘트였다. 새아버지는 웃으며 그에게 장난감 지프를 내밀었다. 아이는 순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태어나서 장난감을 처음 만져봤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그를 직업고등학교에 보냈다. 클레멘트는 "그곳에서 타이어 갈아 끼우는 법을 배우는 게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다"라고 했다.

그는 서서히 뒷심을 발휘했다. 인디애나대에 진학해 심리학 학사를 땄고, 인디애나대―퍼듀대 인디애나폴리스 캠퍼스(IUPUI)에서 전자공학 학사도 받았다.

학위를 받고 나서는 웨이브텍이라는 기술회사 부품생산부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로봇으로 조립할 수 있는 감쇠기(attenuator·전기신호의 진폭을 작게 하는 장치) 등을 잇따라 발명하며 이름을 알렸다.

3년도 되지 않아 의료기구를 만드는 밴텍이라는 회사로 스카우트됐고 4개 특허를 출원했다.

1988년에는 지금의 회사를 직접 차렸다. 복강경 수술 등에 쓰이는 의료기구를 만드는 회사로, 클레멘트는 이곳에서 48개 특허를 출원했다.

클레멘트.jpeg 서울신문, 2017.6.5

(사진설명: 미국인 양아버지의 폭력으로 숨진 현수를 기리는 청동조각상이 한국에 이어 미국에도 세워진다. 사진은 지난 4월 서울 다니엘학교에 세워진 청동상을 조각가 토머스 클레멘트가 만지는 모습.)


클레멘트는 서툴게나마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 손끝으로 나비를 날려 보내는 남자아이 조각을 만들었다(위의 사진).

아내 김원숙은 그런 클레멘트를 옆에서 도왔다. 몇 달 뒤 조각이 완성될 무렵 클레멘트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사실 몇 년 전 메릴랜드에서 양아버지에게 얻어맞아 숨진 현수라는 아이야."

김원숙은 잠시 숨을 멈췄다.

가정폭력으로 숨진 현수는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였다. 2010년 한국에서 태어나 홀트아동복지회에 맡겨졌다가 2013년 10월 미국에 입양됐다. 이듬해 2월 양아버지 브라이언 오캘러핸의 폭행으로 미국에 간 지 4개월 만에 숨졌다. 오캘러핸은 1급 아동학대 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클레멘트는 "현수 이야기를 뉴스로 전해 들었을 때 내가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고 했다.


1998년 클레멘트는 한국 정부와 한국방송공사가 주관하는 입양아 초청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알 수 없는 이유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설명하기 좀 힘든데요. 비행기 창문으로 한국 땅이 보이는 순간 패닉이 됐어요. 40년 넘게 잊고 지냈던 전쟁의 기억, 어머니의 기억, 거리 생활과 고아원의 기억… 그런 것들이 갑자기 휘몰아치면서 '쾅' 하고 온몸으로 충격을 느낀 거죠. 그건 머슬 메모리(muscle memory)인 거예요. 뇌에 간직돼 있는 게 아니라, 내 근육과 몸 안에 깊이 잠들어 있던 기억인 거죠."


한국에 온 클레멘트는 어머니를 찾는 대신 다음과 같은 행보를 해 눈길을 끌었다.


클레멘트는 어머니를 찾지 않는 대신, 해외로 자식을 입양 보내놓고 뒤늦게 자식을 찾고 싶어 하는 부모들을 위해 그들의 DNA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들고, 반대로 부모님을 찾는 입양아들을 위해 이 데이터베이스에 부모 DNA가 있는지 찾아주는 검사 키트를 개인 돈 100만 달러를 들여 만들기도 했다. 그는 "일방적으로 한쪽만 문을 두들기는 경우가 아니라, 서로 애타게 찾고 있는 경우라면 내가 연결고리가 돼주고 싶다"고 했다.


기자가 물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인생을 바꾸고 싶습니까?"


"아뇨. 하나도 바꾸고 싶지 않아요." 클레멘트는 눈을 감았다. "저는 이제 이렇게 믿어요. 어머니는 그때 나를 길에 버린 게 아니었다고. 더 넓고 아름다운 세계를 향해 가는 길로 보내줬다고 말이지요." 그 골목에서 소년은 그렇게 뒤돌아보지 않고 지금껏 걸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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