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장면과 고유한 신체 확보
최근 입양아들 중 생모를 찾아 한국에 오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대개 그가 사는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모든 입양아들이 모국을 찾거나 생모를 찾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입양아들이 생모를 찾고 싶어도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그런 노력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들 중에도 생모를 찾고 싶은 마음은 꿀떡 같은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프로이트의 논문 중, <가족 로맨스>라는 논문이 있다.
그 논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어린아이 때는 부모가 유일한 권위자이자 믿음의 근원이다. 어린 시절 아이들의 강렬하고 유일한 소원은 동성의 부모와 같이 되는 것, 부모처럼 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점점 자라면서 아이들은 자기 부모가 어느 범주에 속한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다른 부모들을 알게 되면서 자기 부모와 비교하기도 하고 그때까지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던 부모의 권위를 의심하게 된다. 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불만스러운 일들로 부모를 비난하기도 하고,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다른 부모가 어떤 점에서는 자기 부모보다 낫다는 지식을 써먹기도 한다. 노이로제 환자의 심리를 통해 우리는 다른 요인들보다 성적 경쟁의 강렬한 충동이 이런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화를 돋우는 주원인임이 분명하다. 무시되는 경우,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경우,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경우, 형제자매와 부모의 사랑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사실에 서운함을 느끼는 경우들이 너무도 많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큼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은 의식적으로 옛 기억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입양아이거나 의붓자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가족로맨스>, 열린책들, 57~58)
프로이트의 이러한 견해는, 자녀가 사춘기에 이르면서 성장과 더불어 부모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욕망이 이런 발달과정의 고통을 통해 필수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입양아들은 보통 사람이 겪는 고통의 반대의 고통을 겪는다.
그들은 너무 일찍 부모로부터 원치 않는 독립을 했다.
성장과 발달을 해 가면서 독립해 가는 고통이 아닌, 처음부터 부모로부터 떠나야 하는 뼈아픈 고통을 일평생 품고 살아야 한다.
그들은 거절당한 고통으로, 그리고 거절의 이슈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성인이 되어 사회적 위치를 견고히 잡아도 이들의 고통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성장의 고통, 거절당한 고통 외에도,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하는 고통이 있다.
성장의 고통은 누구나 겪는 고통이자 겪고 나면 어른이 되어가는 즐거움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고통은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이다.
자기 존재 뿌리를 알 수 없는 고통 말이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적절한 표현은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의 저술에서 유사한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회의하는 이 주체는 고유한 신체가 신체들의 재앙 속에 끌려 들어간 때부터 철저하게 뿌리 뽑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가 남아 있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모든 사유들이 가짜이고 상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기만하는 데 내 모든 정성을 기울인다." 악령의 가정조차도 내가 만들어 내는 픽션이다. 그러나 그처럼 뿌리 뽑힌 채, 고유한 신체와 결속된 모든 시공간적 지표들에 대해 회의하는 이 '나', 그는 누구인가?([타자로서 자기 자신], 동문선, 19~20쪽)
입양아의 고통은 뿌리 뽑힌 채 물 위에 부유하는(floating) 존재, 자기 자신에게 낯선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뿌리 뽑힌 채, 고유한 신체와 결속된 모든 시공간적 지표들에 대해 회의하는 이 '나', 그는 누구인가?라는 리쾨르의 질문에 대해 앞의 글([입양1])에서 어머니를 찾지 않는 클레멘트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어머니를 애써 찾지 않으려는 그의 힘겨운 노력은 자기를 버린 어머니의 고통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를 버린 나쁜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는 좋은 어머니로 남겨두고 싶었을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거절당하여 뿌리 뽑힌 채 나만의 고유한 신체로 살지 못하고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생모를 찾으려는 노력은 곧 나의 고유한 신체를 가지고자 함이다.
입양아는 생모를 찾는 노력을 통해 고유한 신체와 결속된 모든 시공간적 지표들에 대해 회의하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가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는 뿌리 찾기를 거절하고 고유한 신체 확보를 포기한 결과 신체적으로 동조화가 일어나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입양아 현수라는 지적 장애 아이가 가정폭력을 숨진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가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정부의 <입양아 초청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비행기 창문으로 한국 땅이 보이는 순간 패닉이 됐어요. 40년 넘게 잊고 지냈던 전쟁의 기억, 어머니의 기억, 거리 생활과 고아원의 기억,.. 그런 것들이 갑자기 휘몰아치면서 '쾅'하고 온몸으로 충격을 느낀 거죠. 그건 머슬 메모리(muscle memory)인 거예요. 뇌에 간직돼 있는 게 아니라, 내 근육과 몸 안에 깊이 잠들어 있던 기억인 거죠."
라고 말했다.
나만의 고유한 신체확보를 포기한 결과, 과거의 기억과 유사한 고통이 느껴지면 시공간의 지표로서 신체 공조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이상한 질문에 매우 곤혹스러워한다.
"엄마,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나왔어?"
대체로 엄마들은 '다리밑에서 주워왔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아이는 집 근처에 있는 찾아내어 자신의 존재근원이 되는 흔적을 찾으려고 한다.
어떤 엄마는
황새가 날아가다가 너를 떨어 뜨려 놓고 갔어.
또는
화분의 나무 가지에 달려서 나왔어...
등등 수많은 답들이 제시되지만, 아이는 이런 엄마의 말에 의심이 간다.
즉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답변을 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기가 어떻게 잉태되고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알고 있지만, 의식으로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 아빠 사이의 성관계를 통해서 잉태되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프랑스 아동정신분석학자 프랑수아즈 돌토(Francois Dolto)는 잉태된 딸은 자궁 내에서 다음과 같은 의심을 한단다.
"내가 잉태될 때 엄마가 오르가슴을 느꼈을까 안 느꼈을까?
딸이 의심을 하는 것은, 엄마와 아빠와의 친밀한 관계이다.
내가 잉태되는 순간 엄마가 오르가슴을 느꼈다면 내가 아빠를 넘볼 수 없게 되지만, 만일 엄마가 오르가슴을 느끼지 않았다면 나는 아빠를 넘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딸은 대개 아빠 딸이 된다고 한다.
이처럼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 기원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하다.
돌토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입양아는 원초적 장면을 상상할 수 없다"
여기서 원초적 장면(primary scene)이란, 프로이트가 한 말로써, 아기가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 생각하면서 아기가 옆에 있는 데서 부부가 성관계하는 것을 말한다.
아기는 의식으로는 기억하지 못하게 되지만, 무의식 중 매우 중요한 자리에 메모를 해 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기억이 의식의 기억으로 넘어오는 시기가 있다.
그때가 바로 사춘기이다.
이 사춘기는 가족 로맨스와 연결된다.
사춘기가 되면, 그동안 무의식으로만 알고 있던 엄마와 아빠의 성관계를 의식으로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러니까 내가 엄마와 아빠 사이 섹스를 통해 태어났다는 말이지?"
이 사실을 자각한 후, 아이는 뭔가 불결하다는 느낌과 함께 엄청난 충격에 빠진다.
심한 경우, 어떤 아이는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그동안 엄마만큼은 성모 마리아로 알고 있었는데, 엄마도 섹스를 즐겼단 말이야?
이게 말이 돼?
내가 그런 엄마 아빠의 성적 흥분의 결과물이란 말이지?
특히 남자아이의 경우,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어머니에 대한 실망으로 질풍노도의 길을 걷는다.
자신의 존재의 기원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는 것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이 자녀의 자기 정체성에 일시적인 혼란을 초래한다.
이렇게 진행되는 오랜 정체성 혼란은 자신의 성적 욕망이 정당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이제 어릴 때 동성 부모를 이상화하고, 닮아가기를 소망했던 것을 이제 다른 이성을 통해 자기 세계를 확장해 가기로 마음먹게 된다.
프랑수아즈 돌토는 입양아는 바로 이러한 원초적 장면을 가질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을 강조한다.
양부모가 아무리 공감적이고 따뜻한 분들이라 할지라도, 바로 이러한 원초적인 존재의 뿌리에 해당하는 근친상간적 욕망을 꿈조차 꿀 수 없었다는 한계에 부딪힌다.
바로 그때 그는 물 위에 떠있는(floating) 존재, 뿌리 없는 존재, 고유한 신체를 가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왜 사회적으로 성공한 입양아일수록 생모를 더 찾는가?
자신이 사회적으로 높아질수록, 자신이 놓치고 살아가는 존재 기원과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존재 기원을 알지 못하는 입양아는 사회적으로 성공할수록, 더 풍요롭고 권위 있는 삶을 살수록 공허가 깊어가고 허무의 심연은 어둡다.
이러한 심리적 현실만 봐도, 우리는 아무리 보잘것없는 부모라 할지라도 존경받아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