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적 요소의 회복
나는 앞의 글(입양(2): 존재의 뿌리란 무엇인가?)에서, <뿌리 없는 존재>, <물 위에 떠 있는(floating) 존재>에 대해 언급하였다.
사회적으로 성공할수록 존재가 천착해야 할 땅에서 멀어져 뽑힌 뿌리로 떠 다니는 느낌은 자신의 '사유가 모두 가짜고 상상에 불과하여 악령이 만들어내는 픽션과도 같은 느낌'(폴 리쾨르의 말)과도 같다.
이런 느낌이 꼭 입양아들에게만 나타나라는 법은 없다.
나는 이런 느낌을 증상으로 가지고 있어 고통스러워하는 내담자들을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다.
어떤 고교생은 고3이 되어 첫 모의고사를 치르는 중에 받은 첫 시험지에서 글자들이 마구 움직이고, 책상과 주변의 친구들의 얼굴도 함께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책가방을 싸서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 학교로 돌아간 적이 없다.
명문대 3학년 재학 중이던 어떤 대학생은 리포트를 쓰려고 관련 책을 읽는 중 단어와 단어가 연결이 되지 않고, 주어와 목적어 동사를 구별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문장 하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갑자기 발생했다.
그 청년은 갑자기 인지능력이 떨어지면서 아기상태로 되돌아가 버렸다.
또 어떤 사람은 남편과 관계가 멀어져 자신을 지켜 줄 대상을 상실하게 되면서 갑작스럽게 유아의 상태가 되어 내게 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녀가 그 상태 그대로 정신병원을 갔다면 즉시 폐쇄병동으로 들어가야 하는 진단을 받기 쉬운 상태였다.
그녀는 상담 중 밝혀진 것은 갓 태어났을 때 엄마의 외면으로 3일 동안 젖을 먹지 못한 채 머리 위에 버려졌던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녀의 그러한 상태는 꿈에서 그대로 재연되었다.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깊이 애도하면서 증상에서 차츰 벗어나기 시작해 지금은 완전히 회복하여 가정생활과 사회생활까지 잘해 내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어쩌면 그들의 이런 현상은 입양아가 존재의 뿌리를 찾기 위해 생모를 찾는 상황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지 모른다.
그들의 증상을 시간적 개념으로 보면, 일종의 <심리적 퇴행>에 해당되지만, 병증으로 보면 <이인증>에 해당한다.
(출처: pixabay)
이 글이 <이인증>으로 접근하면, 너무 거대한 담론이 되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오늘은 그들의 그러한 존재의 상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이 회복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유아기에 엄마와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여성적 요소>이다.
<여성적 요소>란 건물을 지을 때 기초공사와도 같아서, 기초공사가 부실하면 조그만 바람에도 건물이 쉽게 흔들리 듯이, 이런 저런 조그만 사건으로 불안이 확 밀려오는 순간, 순식간에 정서적 상태가 유아기로 급격히 회귀하는 것이다.
아마도 건물이 높지 않다면, 기초가 없어도 아무 일이 없겠지만, 건물의 높이를 올림으로써 부실한 기초로 건물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이런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인증, 퇴행 등은 공부를 너무 잘하려고 했다거나, 사회적으로 유능해지기 위해 너무 애썼다거나, 자신의 존재보다 사회활동을 너무 크게 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또 한 가지의 가능성은, 나의 존재 본질과 너무 다른 존재로 살고 있을 때 내 안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위니캇은 아기는 생애 첫 1년 동안 여성적 요소를 획득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프로이트가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유아성욕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는다고 강조한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그리하여 프로이트는 아기가 젖을 먹는 것, 손가락을 빠는 것, 똥을 싸는 것 등을 다 유아성욕과 연결하여 서술한다.
엄마의 젖을 빨다 보니 빠는 입술에 쾌감이 생긴다.
젖을 먹으면 고픈 배를 채워주는 쾌감과도 연결된다.
배를 채워주는 쾌감과 젖을 빠는 기쁨이 연결될 때, 그것은 식욕과 관계된다.
그런데 아기가 젖이 없으면 젖꼭지 대신 손가락을 빠는 이유는 배고픔과 관련된 식욕의 문제가 아니라, 유아성욕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프로이트의 입장이다.
심지어 프로이트는 아기의 배설 행위조차도 성적 쾌감과 연결한다.
그리하여 프로이트는 이를 <구강기 – 항문기 – 남근기>로 대별하여 성적 리비도의 흐름을 신체기관의 발달과정으로 설명하였다.
반면, 위니캇은 아기의 첫 1년 동안 성적 요소가 들어오는 상황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여성적 요소는 아기의 첫 1년 동안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이 시기의 남자아이나 여자아이 모두에게 공히 필요한 요소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 존재로서 인생을 출발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여성적 요소’이다.
아기는 여성적 요소를 엄마에게서 가져온다.
엄마로서는 아기에게 자신의 여성적 요소를 부여해 주기 위해 함께 ‘존재하기’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동안 아기와 엄마는 존재론적으로 겹친 상태를 유지한다.
아기는 태어나면서 원형과 본능을 가지고 나온다.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종의 원형, 개는 개로서의 종의 원형을 획득하기 위해 어미와 함께 살아야 한다.
1920년 인도 켈커타 서부 미드나포르(Midnapore)의 늑대굴에서 발견된 카말라(Kamala)와 아말라(Amala) 늑대소녀 자매는 발견된 후 30년을 인간사회에서 생활했지만 계속 네발로 기어 다녔고, 평생 언어 사용이 불가능하였다고 한다.
유아기에 엄마의 품 안에서 획득해야 할 인간으로서 원형을 획득하지 못한 결과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여성적 요소가 없었을 것이다.
엄마와 아기가 첫 1년 동안 융합상태를 경험하기 때문에 아기는 인간으로서 원형을 획득할 뿐 아니라, 엄마로부터 ‘여성적 요소’를 획득한다.
여성적 요소는 칼 융이 말하는 여성성과는 다르다.
여성성은 남성성과 상대적 개념으로 상호 짝을 이루고 있지만, 여성적 요소는 존재의 근원이자 삶의 뿌리에 해당한다.
그래서 여성적 요소는 존재 동일성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고자 할 때 <여성적 요소>의 영역으로 내려간다.
드라마 ‘두 번째 스무 살’에서, 주인공 하노라는 오랫동안 가부장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남성적 질서 원리에 휘둘려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외면한 채 살았다.
어느 날 하노라는 삶의 허무감과 공허감을 느끼며, 뭔가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생을 새롭게 살아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젊은 시절에 포기했던 대학생활에 도전하면서 아들이 다니는 대학에 입학한다.
하노라는 새롭게 도전하는 삶의 여정을 전개해 가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존재감을 얻어간다.
이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이 과정에서 유아기부터 잠재해 온 하노라의 ‘여성적 요소’가 여러 모양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여성적 요소에는 종교적 회심의 기능도 있다.
성 어거스틴의 회심은 개별적인 회심 외에 어머니 모니카의 헌신적인 기도와 인내심 있는 기다림 속에서 이루어졌다.
성령 하나님이 사람의 인격 안에서 역사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심의 방식이다.
내 안에 거주하는 성령의 신은 다분히 여성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령은 내 안에서 부끄러워하며 숨어 있는 형태로 거주한다. 내 안에 ‘숨은 신’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다. 이 신은 누구나 유아기에 만난 적이 있는 존재다.
I am을 획득하기 위해 엄마의 품에서 오랫동안 ‘통합되지 않은 상태’([불안한 부모를 위한 심리수업], 121 참조)에 머물며, 엄마의 존재 깊은 곳을 딥-러닝(같은 책, 194 참조)하는 동안, 엄마 안에 ‘숨은 신’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여성적 요소’는 새로운 삶을 위한 창조가 일어날 때 주체를 포섭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2)의 땅의 혼돈과 공허, 흑암의 깊음은 창조를 위한 준비단계로서 여성적 요소를 잘 보여준다.
입양아들이 양자로서 입양되었을 때, 양부모가 아무리 친절하고 공감적이며 따뜻하다 해도 원초적인 존재뿌리에 닿을 수 없어 늘 붕 떠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존재(있음)의 내용물이라 할 수 있는 <여성적 요소>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의 입양예로 든 클레멘트의 경우, 어머니가 골목길에서 아들을 홀로 걸어가게 하고 사라져 버렸다.
이 아들은 이미 여성적 요소를 확보하였기 때문에 굳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어머니를 만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아기를 1년 동안을 직접 양육했다면, 그 아이는 여성적 요소를 확보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입양아는 이국에서 좋은 양부모를 만나 잘 성장하였다면 굳이 어머니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생후 1년 미만의 나이에 입양이 되었다면, 그 아이는 성인이 되어도 자기 자신이 낯설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만일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면, 꼭 생모를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 사회에서 높이 올라가는 만큼, 자신의 뿌리가 뽑혀 있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입양아든지, 새로운 삶을 살고자 종교적 또는 정신적 회심을 하는 사람, 또는 퇴행하여 이인증을 겪는 사람이라면 자신 안에 들어와 느슨하게 자리 잡고 있는 여성적 요소를 더욱 견고하게 한 후에야 비로소 큰 확신을 가지고 힘차게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하여 미래를 새롭게 기획할 수 있다.
중세 시대에는 종교적 수양을 위해 사막으로 들어가는 수도사가 있었고, 오늘날에는 도를 닦기 위해 출가를 하는 사람이 있다.
현실의 삶을 사는 중에 증상이 현실존재를 끌어내려 이인증을 발병케 하거나, 존재론적으로 퇴행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또는 지금까지 잘 살아오던 삶을 돌이켜 회심하여 종교적 신앙에 천착하는 현대인들도 있다.
각자 정서적 상황의 형편에 따라 긴 고통의 과정을 겪게 되겠지만, 이들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점은 바로 그런 과정을 겪어낸 후에는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성적 요소를 재창조하면서 과거의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며 새로운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사도 바울이 그랬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게 되자,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막으로 들어가 혼자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뻐하고 거기서 만족하였으면 일개 신비주의자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의 방향이 180도 바뀌었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의식을 전환하여 현실을 산 것이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여성적 요소를 새롭게 다지기 위해 아라비아 사막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3년(짐작)을 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