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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과 화목하기

배타성과 친밀함

배타적 관계


우정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의하면, 우정은 매우 배타적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우정을 나눌 수는 없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몇몇의 친구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우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주변사람과 다 우정을 나누려다가 모든 사람을 다 놓쳐버릴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몇몇 사람과 배타적인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도 연결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친구는 누구도 시기할 수 없는 단짝친구가 있고, 그 외 2~3명의 친한 친구가 있으면 족하다.


고양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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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이가 고양이를 좋아해서 엄마가 고양이 한 마리를 분양을 받았다.

이 아이는 고양이를 너무 귀여워하고 예뻐하여 밥 먹을 때도 고양이를 끼고 먹고, 잠 잘 때도 고양이와 함께 잔다.

문제는 이 아이가 모든 고양이를 다 좋아한다는 것이다.

길거리를 가다가도 길고양이도 너무 예뻐해서 고양이가 눈앞에서 사라지기까지 지켜보는 데 시간을 다 보낸다.

하루는 이 아이가 학원을 가다가 학원 시간에 늦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학원 가는 길에 어느 가게에 집 고양이가 문기둥에 묶여 있었는데, 그 고양이를 예뻐해 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다가 지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아이에게는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는 무엇일까?

고양이가 아무리 예뻐도 일단 내가 키우는 반려묘를 배타적으로 예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아이는 내 고양이만 예뻐하고 다른 고양이를 동일하게 예뻐해 주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형 사랑

어떤 여성 청년의 이야기이다.

이 청년의 취학 전 연령 시기에 엄마가 인형을 하나 사줬다.

딸이 인형을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엄마는 또 하나의 인형을 사줬다.

엄마는 그 이후 인형이 보이는 쪽쪽 다 사 와서 딸에게 줬다.

딸 주변에는 인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딸은 인형들에 둘러싸여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하게 되었다.

엄마는 이 딸을 데리고 친척집이라도 가게 되면, 인형을 별도로 챙겨야 하는 큰 짐이 되었다.

친척집에 가면, 보통 친척 집에 있는 또래 아이들과 함께 놀아야 하는데, 이 아이의 행동은 달랐다.

또래 친척아이들과 노는 대신, 종일 인형들과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그때 '왜 그랬느냐?'라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한두 인형만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어요.

어느 하나의 인형을 좋아하면 다른 인형들이 섭섭해할 것 같아서, 다른 인형을 달래주기 위해 모든 인형을 다 챙기게 되었어요.

그때는 잠을 잘 때도 저는 모든 인형을 다 끌어안고 잤어요.


이러한 패턴은 성인이 되고 나서 남자와의 관계에서도 반복되었다.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한 남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남자가 내게 호감을 보이면 거절하지 못하고 따로 만나고 있었다.

그렇게 만나는 남자친구가 5명까지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녀는 여자 친구 중에 남자친구가 있으면 꼭 소개를 받고야 마는 집요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자신의 남자 친구를 만날 때 그녀는 둘 사이에 끼어들기를 좋아했다.

심지어 여자 친구가 잠시 화장실 간 사이에 별도의 둘만의 만남을 약속하는 데, 여자 친구가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이면 충분했다.

세 사람이 함께 만나 식사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했고, 그녀는 여자 친구 몰래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를 빼돌려 따로 만나는 일도 즐겼다.

그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가 자기를 챙겨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기가 막히게 만들어 냈다.

몇 달 후, 이 남자와 여자는 여자 친구의 의사와 무관하게 따로 만나고 있었다.

남자로 하여금 양다리를 걸치게 만든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여자 친구는 두 년놈들을 다 잘라 냈다.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롬 12:5)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 구절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즉 모든 사람과 다 잘 지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하게 되고, 이중 인격자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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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조 자체가 불평등 구조인데 평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엉뚱한 상황이 벌어지듯이, 모든 사람과 다 잘 지내려다가 자신의 진심이 왜곡되는 현상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개별관계에서 거리를 잘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3미터 미인(?)이고, 어떤 사람은 10미터 미인, 어떤 사람은 50미터, 어떤 사람은 100미터 미인이다.

즉 3미터 미인이란, 3미터 거리로 가까이 있어도 늘 잘 지낼 수 있는 관계이다.

10미터 미인이 5미터로 가까이 와 있으면 언젠가 위태로운 일이 발생한다.

지금은 잘 지낼 수 있어도 언젠가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 아예 관계 자체가 절단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10미터 미인이 5미터로 가까이 있으면 밀어내야 한다.

사람은 타자를 절대 같은 태도로, 같은 마음으로, 동일한 사랑의 깊이로 대할 수 없다.


어떤 신흥 종교는 사랑을 강조하면서 평등한 사랑을 요구한다.

그래서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다른 계명으로 바뀐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라는 계명이

"네 이웃의 아내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바뀐다.


배타성의 배제


위에서 언급한 모든 사례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배타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배타성에 대해서는 이미 나의 브런치 [몸에 대한 성애화 이미지(2)]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요약하자면,

아기가 생애 첫 1년 이내에 감각을 발달시켜야 하는데, 엄마를 기준으로 엄마와 엄마 아닌 것을 구별하면서 각종 감각을 발달시킨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냄새로부터 엄마만의 고유한 냄새를 구별해 내면서 후각을 발달시키고,

세상의 모든 맛으로부터 엄마가 제공하는 젖맛을 구별해 내면서 미각을 발달시키고... 등등의 방식으로 아기의 각종 감각이 발달한다.

아이는 엄마에게만 집중되는 배타성을 터득하면서, 학교에 들어가 단짝 친구를 만들고, 사춘기에는 유일한 사랑대상을 만드며, 배타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배우자와 결혼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배타성은 곧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

모든 고양이를 사랑하거나, 모든 이성을 사랑하거나, 또는 모든 사람을 가까이 두려는 사람은 결국 나만의 고유한 자기 정체성이 없는 것이다.



좋은 사람(친구)이 나타나면 절대 가까이하지 마라


사무실 주변에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새로운 음식점이 들어서면, 맛있다고 너무 자주 가서는 안 된다.

시각을 바꿔, 음식점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음식이 맛있다고 매일 찾아오는 손님은 절대 단골이 될 수 없다. 일주일에 한 번, 또는 열흘에 한번 정도 찾아오는 손님은 단골이 될 수 있다.

매일 찾아오는 손님은 금방 질려서 다른 음식점을 찾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일정 간격을 두고 띄엄띄엄 꾸준히 찾아오는 손님은 자기 입맛을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그 음식점의 단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이 40세가 넘어 친구가 없어 적적한 중에 누군가 좋은 사람이 친구로 나타나면 그런 사람을 절대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너무 자주 만나면, 사람이란 어느 순간 냄새(?)가 나기 마련이고 그 냄새를 아무리 감추어도 언젠가는 그 냄새를 드러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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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이라 함은, 꼭 나와 성격이 같다거나, 같은 정치적 색깔을 가지고 있다거나, 평소 가치관이 비슷해서 마음이 잘 통한다거나 하는 조건들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친구라도 성격이 다를수록 서로에게 더 매력적일 수 있고, 정치적 색깔이 달라도 서로 다른 것으로 인해 균형을 맞출 수 있으며,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도 서로를 존중해 주는 마음이 있으면 좋은 것이다.

친구로서 서로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좋으나, 너무 친밀감이 깊어지면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사람은 100% 선한 사람 없고, 100% 악한 사람 없다는 점을 명심하자.

이미 나이 40세가 넘었으면, 사랑과 미움의 변증법을 거치면서 친밀감을 쌓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이다.

또한 그 나이면 배타성의 원리가 적용되기도 이미 늦었다.

중년 이후에는 좋은 사람을 만나면, 서로 좋은 부분을 공유하면서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열어가면서 관계를 길게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가 위기를 당할 때는 언제든지 진정한 이웃이 되어 언제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역동적인 관계를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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