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론과 나르시시즘의 차이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노예도덕 극복 방법으로 '초인'이 되기를 제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니체가 말하는 초인을 마치 초능력자와 같은 좀 특별한 존재, 보통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자기 자신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능력을 가지며, 자신의 욕구와 본성을 잘 이해할 뿐 아니라 잘 다스리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초인은 자기 결정권을 가진 존재이다.
즉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데 있어 외부의 기준이나 규범에 의거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초인은 주인도덕을 가진 자를 말한다.
나는 브런치 이전 글, [성숙한 삶을 위한, 노예도덕에서 주인도덕으로(1)]에서 주인도덕을 두 가지로 나눠 서술한 적이 있다.
주인도덕에는 긍정적 의미의 주인도덕과 부정적 의미의 주인도덕이 있다.
부정적 의미의 주인도덕은 데카르트가 말한 유아론적 주체(solipsistic subject)이다.
데카르트는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 주체 중심의 철학을 내세웠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객체는. 매우 보잘것없는 존재로서, 주체가 가치 부여를 할 때에만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주체에게 있어 객체의 의미는 개발 대상이든가, 또는 정복의 대상이었다.
자연을 예로 들어 보자.
중세 시대의 자연은 신의 숨결이 흐르는 곳이자, 신성한 곳이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자연은 개발의 대상이었다.
근대적 개발논리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그 개발논리는 약자에 대한 정복 논리로 발전한다.
그 개발논리를 내세울 때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 1:28)
그들은 땅에 충만하라는 신의 명령이 땅을 정복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하여 미개한 제3세계를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는 것은 신의 뜻으로 규정했다.
이처럼 데카르트의 유아론적 주체개념은 결국 제3세계에 대한 식민지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류의 주인도덕은 객체 또는 대상에 대한 배려나 공감은 전혀 없다.
좌파 우파를 불문하고, 독재자들이 모두 주인도덕을 가진 자들이었다.
유아론이 부정적 의미의 주인도덕이라면, 나르시시즘은 그 자체가 노예도덕이다.
'나르시시스틱' 하다는 말은 우리말로, '자기애적'으로 번역된다.
보통 '자기애적'이라는 말은, 위에서 말한 '유아론적'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즉 자기밖에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용어와 잘 맞지 않다.
'나르시스틱 하다', 또는 '자기애적이다'라는 말은 상담 현장에서 가장 많이 쓰는 용어 중 하나이지만, 대체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
상담자들 조차 용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모르면서 사용하는 것 같다.
아무도 분명한 설명을 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자기애란, 글자 그대로 자기 사랑이다.
즉 self-love이다.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의 자기 심리학에서는, 제일 먼저 강조되는 것이 바로 '일차적 자기애'개념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빈 잔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 잔은 오직 어머니의 공감과 사랑, 그리고 인정으로 채울 수 있다.
어머니가 아기를 충분히 사랑하고 공감해 주고, 인정해 줄 때, 그 양이 어느 정도 충분히 채워질 때, 그 아이는 '일차적 자기애'가 채워진다.
이 '일차적 자기애'가 온전히 채워진 사람은 '긍정적 의미의 주인도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일차적 자기애란 엄마의 공감과 사랑에 의해 한번 충전되면, 그것은 영원한 충전이 된다.
이런 사람은 남의 눈치나 인정을 바라보면서 자기 판단과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 안에서 합리성과 주관성 및 객관성을 도출해 내어도 누가 봐도 그것은 최상의 판단과 선택이 된다.
그렇지만 이런 자기애가 충만하게 채워진 사람, 즉 주인도덕을 가진 사람은 보기 드물다.
대부분 사람들은 일차적 자기애를 채우지 못해 노예도덕으로 산다.
자기애가 채워지지 못한 상태, 즉 self-love가 부족한 상태는 '나르시시즘'의 상태로 규정된다.
'자기애적'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애를 채우지 못한 이유가 엄마의 공감과 인정, 박수, 그리고 찬사를 받지 못한 데에 있다.
자기애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공감과 인정을 받고자 무진 애를 쓴다.
자기애적인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기애적'인 사람은 자기 기준을 가지지 못해 다른 사람의 의견에 영향을 많이 받아 타인에 의해 쉽게 휘둘리고, 귀가 얇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자기애적인 사람은 중독에 잘 빠진다.
일중독, 공부중독, 술중독 등이 대표적이다.
직장에서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조직 내 한 사람 정도는 동료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오직 상사의 눈에 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대개 일 중독이다.
자기애적인 사람의 문제는 인정을 받지 못한 데서 오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상사의 인정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몇 배로 열심히 일한다.
그렇게 열심히 한 결과 상사의 인정을 받은 후가 문제다.
열심히 한 그 일이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상사의 인정을 받은 후에는 허무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나의 일이 아닌, 남의 일로 그렇게 열심히 하여 인정을 받았으니 그다음에는 공허감과 허무감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 공허감과 허무감을 해소하기 위해 이번에는 술을 마신다.
그래서 일중독은 자연스럽게 술중독으로 이어진다.
아이는 엄마라는 대상을 마치 자기 자신처럼 사용한다.
코헛은 이것을 <아이가 엄마를 '자기-대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아기는 일차적 자기애를 기본적으로 채웠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한 동안 엄마를 자기-대상으로 사용한다.
엄마를 자기-대상으로 사용한다는 말은 엄마를 마음껏 휘두르고, 엄마는 아이의 의도대로 휘둘려 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아이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서 고집스럽게 자기 욕심을 관철시키기도 하고, 또 어떤 아이는 자기 뜻대로 엄마가 뭔가 해주지 않으면 땡깡을 부리기도 한다.
아이의 이런 모습이 엄마를 자기-대상으로 사용하는 모습이다.
아이는 아직 자아 리비도와 대상 리비도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아이는 여전히 엄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이는 엄마나 아빠를 마음껏 휘두르기를 언제까지 하느냐 하면, 성인이 되기까지 한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기절할 것이다.
부모의 중요한 역할은 결국 아이가 타고난 공격성을 성인이 되기까지 다 쏟아낼 수 있도록 자녀에게 그런 공격대상이 되어 주는 것이다.
이 정도 이야기하면, 부모 노릇하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렇게 자기-대상이 되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아이가 성인이 되면, 자기보다 약한 배우자에게 자기-대상이 되어 주기를 바라게 되고, 또한 직장에서 힘 있는 자리에 세워지면 약자에게 갑질을 하게 된다.
만일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를 자기-대상으로 충분히 활용하며 자랐다면, 그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동안 부모를 자기-대상으로 휘두르는 데 사용했던 공격성은 이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으로 바뀌게 된다.
그 자녀는 그때야 비로소 더 이상 자기애적 리비도를 엄마에게 투사할 필요가 없어지고, 자기애적 리비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면서 자기 자신을 잘 보존하고 스스로를 잘 챙기게 된다.
아이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엄마를 자기-대상으로 활용함으로써 충분히 자기애적 리비도를 사용하여 더 이상 자기애적 리비도를 대상에게 투사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때야 비로소 자아를 자아 자체로 보게 되고, 대상을 대상 자체로 보게 된다.
이처럼 자기와 대상의 구별이 확실하게 되면, 사람과의 복잡한 관계에서도 엉뚱한 오해나 딜레마에 빠져들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