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질문을 해 보았다면, 이 질문에 답해 본 적이 있는가?
이 글은 당신이 누구 인가를 알려주는 글이라기보다는 그 질문에 답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글이다.
이 글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수천 년간 해 온 질문이지만 답을 얻지 못하여 오랜 세월 실패해 오던 중에 이를 나의 방식으로 답변하기 위해 여러 분야를 제대로 섭렵하지도 못한 채 일천한 지식으로 길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누군가가 좀더 전문적으로 발전시켜 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한 번 열어보는 길이다.
나는 ‘나’를 알아가는 도구로서 ‘자아(ego)’의 개념과 ‘자기(self)’의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 글을 읽었다고 ‘나는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생각은 아예 내려놓기 바란다.
누구나 자신 안에 있는 자아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내 안에 자기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자기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해도 내 안에는 엄연히 자기가 존재한다.
자아와 자기는 모두 내 안에 있는 것이지만 두 가지 면에서 두드러지게 다르다.
첫째, 자아가 의식의 중심 주체라면 자기는 자아와 의식, 무의식 그리고 신체까지 포괄하는 전인격적 주체이다.
둘째, 자아는 나만의 것이라면, 자기는 너와 나, 나와 그(것), 우리 모두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직장에서 사회적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이나, 환자를 돌보는 의사나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나, 이웃을 섬기는 봉사자나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나 부부관계에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자기 자신을 돌봐야 한다.
‘자기 자신’이라 할 때, 자기는 셀프이고, 자신은 몸을 말한다.
자아 안에는 몸이 들어오지 않지만 자기 안에는 몸이 포함된다.
자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잘 살아간다.
그런 사람은 알고 보면 자기가 원하는 삶을 자아가 잘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건강한 사람의 특징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아가 자기와 멀어진 삶, 자기가 원치 않는 삶을 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신체적 질병과 마음의 병, 각종 심리적 증상을 앓는다.
자아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주체이지만, 자기는 자아를 매개로 하여 현실을 파악할 뿐 현실과는 물리적 거리가 있다.
건강한 사람이든 각종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이든 누구나 콤플렉스는 다 가지고 있다.
콤플렉스 역시 자기와 자아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응어리이다.
자기는 내 안의 매우 깊은 곳에 있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자아 안에 수많은 콤플렉스를 심어 놓는다.
그리하여 건강한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아로 하여금 주변 콤플렉스를 통합하고 콤플렉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도 한다.
자신 안에 있는 자기를 잘 아는 자아는 콤플렉스 안에 있는 감정에너지를 회수하여 자기와 보다 원활하게 교통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아 탄력성’이 높아져 현실을 잘 살아내는 자아가 된다.
그러면 콤플렉스에 대해 알아보자.
일반적으로 ‘콤플렉스’라 하면, 열등감, 건드리면 아픈 곳 등의 의미 정도로만 알고 있다.
‘콤플렉스’란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이다.
이 응어리는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응어리는 유아기 또는 아동기에 형성된 것이거나 실제 사건과 각종 갈등을 경험한 결과 심리적으로 뭉쳐 있는 것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는 데에는 자신을 물었던 개가 죽어가던 모습에 대한 사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개에 물린 상처를 낫기 위해서는 자기를 물은 개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영혜 아버지는 개의 고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오토바이에 묶어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같은 길로 돌아 헐떡이게 만들었다.
영혜는 눈을 희번덕이는 흰둥이를 보았고,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을 보았다.
개를 고운 국밥을 먹으면서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영혜 자신을 보던 두 눈을 기억했다.
그러한 사건은 마음속에는 심리적 응어리, 즉 콤플렉스로 남아 결국 영혜로 하여금 고기를 먹지 못하는 채식주의자로 전락시켰다.
자아가 미성숙하여 자아가 감당하기 힘든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면 콤플렉스로 남게 된다.
콤플렉스는 이와 같이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자아가 형성조차 안 된 유아기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작은 사건들도 콤플렉스로 형성되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자아는 이러한 콤플렉스들이 모여서 형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형성된 콤플렉스는 많은 감정들을 흡수하여 내 안에서 본래적 마음의 왜곡을 일으키며 응어리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콤플렉스 안에는 감정의 에너지와 사건들이 이야기의 형태로 뭉쳐져서 하나의 증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콤플렉스는 자율성을 가지고 있어 콤플렉스가 증상으로 드러날 때는 자아의 기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아와 콤플레스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자아도 하나의 콤플렉스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나 자신을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자아가 왜 콤플렉스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관점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첫째, 자아는 자기로부터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자아는 그 자체가 콤플렉스 상태이다.
‘자아’는 현실과 직접 닿아있는 인격기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식주체나 대부분의 학문 세계의 주체는 ‘자아’이다.
그러나 사람 안에는 ‘자아’ 외에도 ‘자기’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기는 자아의 이면에 있는 무의식 세계를 관장하기도 하고 타자의 세계 및 외부 사물의 세계, 더 나아가 우주와 신과의 연결 코드를 가지고 있는 인격 기관이다.
인격의 성숙이라는 것은 자아가 자기와 연합하여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자아는 콤플렉스를 벗지만 자아가 완벽하게 자기화 될 수는 없다.
둘째, 자아가 콤플렉스인 이유는 자아 주변에 있는 수많은 콤플렉스를 관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콤플렉스가 아니라면 주변 콤플렉스들과 관계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주변 콤플렉스들은 감정 응어리의 정도에 따라서 자아의 자유의지를 약화시킨다.
어떤 청년이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다 치자. 이 청년은 자아의 기능을 최대한 높여 여성과 친밀해지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자아의 이러한 의지를 방해하는 콤플렉스가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이렇게 사랑을 하는 게 맞나?’ ‘저 여자를 싫어해야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나중에 저 여자가 내 스타일이 아니면 어떻게 하지?’ 또는 ‘내가 혹시 게이가 아닐까?’ 등 각종 콤플렉스들이 작동하여 자아의 기능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와 콤플렉스에 관한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가 사람을 살해하여 재판에 회부되면서 반드시 심리검사를 받게 된다.
그 심리검사는 그 용의자가 정신분열증 환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그가 사람을 죽일 때 콤플렉스가 작동한 것인데, 그 콤플렉스의 행위에 자아 콤플렉스가 참여했는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만일 그의 콤플렉스가 사람을 죽이게 되었지만 그 순간 자아 콤플렉스가 참여하지 않았다면 법적으로 책임을 유예하든가 아니면 감면하게 된다.
이는 범행당시 자아의 자유의지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그 행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 동안 우리 주변에 흔히 있었던 ‘취중 폭행’이 바로 그런 것이다.
과거에는 술이 취해서 무자각 상태에서 일어난 폭력이라 훈방조치 정도로 그쳤다.
최근 들어 취중폭행이 많이 줄기도 했지만, 그 책임 또한 과거와 같이 너그럽게 용납되지 않는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만취하는 것 또한 자아의 책임에 달려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 만큼 우리 사회도 성숙해 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