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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자기(2): 자아심리학과 자기심리학

온 우주로 연결된 자기(self)

너무 다른 두 가지 심리학: 자아 심리학 vs 자기 심리학


오늘날 대부분의 심리학은 자아 심리학이지만 자기 심리학을 함께 이해해야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잘 알아갈 수 있다.

자기를 떼어 놓고 자아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아심리학적인 삶을 산다고 치자.

이 사람은 어디를 가나 적응 잘하고, 현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갈 뿐 아니라, 심지어 현실을 조작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변형시키고, 왜곡까지 할 수 있다.

그의 자아는 자신을 잘 챙기기 위해 권력을 이용할 수도 있고, 그런 권력이 없으면 생존과 번영을 보장해 주는 권력에 붙어 아부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남들이 볼 때에 힘으로나 재물로나 떵떵거리고 살 수 있다. 사회적으로 존경과 존중은 받지 못해도, 현실적으로 남들보다 더 우위에 있고, 경쟁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증명서를 위조하기까지 하면서 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의사가 되기까지 엄마 찬스 아빠 찬스도 자신의 ‘능력’이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나, 힘 있는 엄마의 힘을 배경으로 명문대에 들어가서 교수들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아심리학 입장에서는 매우 건강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전후좌우를 살필 필요 없이 자신만 챙기며, 나는 ‘잘 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나는 ‘원래 잘난’ 것이라 주장도 힘 있는 자아의 표상이다.

뒤에서 뭐라 하든, 대중이 뭐라 하든, 언론이 뭐라 비판하든 이미 '나는 잘 났으면' 되는 것이다.

자아 심리학적으로 사유하는 자신이 이런 자만에 빠져도 자만인 줄 모르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실력이요 나만 가지고 있는 능력인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심리학의 관점에 서 있는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우울하게 만들고,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든다.

한번 실수조차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양심의 가책이 자신의 일상의 삶을 힘들게 만든다.

그런 세상 속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사실에 대한 자각만으로도 자신의 처지를 비참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 자기 심리학이다.

자기 심리학은 ‘사탄이 통치하는 곳에서 의인으로 사는 것(자아심리학)보다 신에 의해 통치되는 죄인으로 사는 것이 낫다’는 마틴 루터의 말([로마서 서문])과 딱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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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느 심리학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두 심리학을 알고 모르고는 상관이 없다.

자신의 깊은 심연에서 요구하는 바를 따라 살아가고자 한다면 당신은 바로 자기 심리학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아심리학으로 살아간다.

사람들은 왜 자기 심리학을 모르는가?

또는 왜 사람들은 내면의 요구를 묵살하며 살아가는가?

그것은 인류가 그렇게 살아온 오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데카르트가 그랬고, 데카르트를 무너뜨린 니체가 그랬다.

이제 잠시 두 철학자의 사유로 넘어가 보자.


데카르트적 근대성과 죽음을 생산하는 이성


근대시대의 자아는 처음에는 ‘주체’의 명문가문답게 매우 고상하게 출발했지만 갈수록 고삐 풀린 망둥이처럼 변해 갔다.

근대 주체의 명문가문에는 객체가 있을 뿐 타자성, 대상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프로이트가 데카르트를 극복하고자 의식의 폭력을 막고자 무의식의 개념을 이끌어 내었으나 데카르트와 같은 결론을 내린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연구한 무의식 연구로 학문적 가문의 정통성을 후대가 이어갈 수 있도록 신흥 명문가문을 세우지 못하고, 데카르트의 ‘근대성’이라는 명문가문의 전셋집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주체를 ‘데카르트적 의식’ 대신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명문가문을 세우는 듯 흉내만 내다가 자신의 심층심리학은 ‘자아심리학’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자크 라캉은 이에 대한 반기를 들면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쳤지만, 그 구호는 의식 중심의 자아심리학을 배제하기 위해 1915년 이전의 프로이트를 돌아갈 고향으로 삼은 것이다.

오늘날 데카르트적 근대성을 문제 삼는 것은 주체가 자신의 의식만 중시했을 뿐 ‘타자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체의 저편에 있는 객체는 나와 동등한 타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복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중세시대에는 하나님의 창조물이었던 자연은 개발의 대상이 되고, 유럽보다 미개한 제3 국가들은 식민정복의 대상이었다.

‘I - You’의 동등한 주체로서의 연결체계로서가 아니라 ‘I - it’라는 서로 다른 차원에서 다르게 존재하는 불연속적 관계, 즉 주체와 객체의 관계였다.

객체는 I와 같은 동등한 인격으로서 You가 아니라, it라는 사물의 차원이었다.

주체와 객체의 존재론적 불균형! 이것이 데카르트적 근대성의 문제였다.

데카르트적 근대성의 생산성은 바로 객체에 속한 자들을 사물화 하고 정복하여 노예화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데카르트적 근대성은 인간을 사물화 하여 급기야 죽음을 생산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데카르트의 근대성의 절정을 이룬 사건이 발발하는 곳은 바로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나치정권이 유대인을 죽일 때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사물을 죽였고, 폭발하는 감정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냉철한 근대적 이성으로 죽였다.

나치는 유대인이라는 인간을 죽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사물을 죽여 죽음을 생산했다.

600만 명의 주검을 생산하여 비누와 기름과 단추와 금이빨 등 각종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이것이 데카르트적 근대성이 만들어 낸 ‘이성’의 찬란함의 이면이었다.

죽음을 생산한 이성!

그 이성이 바로 20세기의 자아이다.

비타민 음료에는 비타민이 없고, 의사는 암 환자에게 죽음을 선포하고, 병원에는 치료가 죽어있고, 학교에는 교육이 죽었고, 공산당은 공산주의가 죽었고, 민주당에는 민주주의가 죽었고, 국민의 힘에는 국민이 죽었고, 신학교에 신학이 죽었고, 네 안에는 네가 죽고, 내 안에는 내가 죽었으며, 우리 안에는 우리가 죽었다.

주체의 죽음은 곧 대상의 죽음이다.

그리하여 법률가는 법을 죽이고, 교육자는 교육을 죽이고, 의사는 환자를 죽이고, 성직자는 하나님을 죽이고, 소설가는 독자를 죽이고, 독자는 작가를 죽인다.

이것이 죽음을 생산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모습이다.


니체, 초인의 자아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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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2800년 흘러 온 철학역사의 수레바퀴를 부숴버렸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부숴 버렸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분법적 형이상학을 산산조각 내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니체는 인간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스토아철학까지도 산산조각 내 버렸다.

니체가 최종적 살해욕망을 드러낸 것은 바로 신이었다.

그래서 니체는 ‘망치를 든 철학자’로 불린다.

니체의 망치가 부수고자 했던 최종 목표는 ‘습관적인 제도’였다.

사상으로 무장하여 고상해진 인간 속에 있는 유치한 욕망을 드러냈고, 종교로 제도화된 신을 부숴 버렸다. 그래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다 부숴 버리고 난 니체가 고민에 빠졌다. 망치로 다 부숴버리고 나니 자신의 철학을 담을 그릇마저 부숴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상적 폭거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니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의 철학은 초인을 지향하기 때문에 타자성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한때 ‘전능환상’을 가지는 것은 있음 직하다.

‘전능환상’없이 살아가는 삶은 밋밋하고 무의미하며 아무런 욕망 없이 평정심(apatheia)을 가지고 금욕적으로 살기를 바라는 스토아철학을 반영하는 것이다.

니체는 초인을 지향하면서 ‘자아 팽창’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선 저편을 지향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몸의 저편에 있는 영원한 것을 제거해 버렸다.

니체는 나르시시즘(자기애)의 극치를 이룬 철학자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부친살해를 감행하여 결혼을 하지 않고 결혼을 해도 자식을 낳지 않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의 명제를 뒤집어 ‘없는 것도 있다’를 주장하면서 ‘부친살해자’로 자칭한 것은 겸손의 소치였다.

니체는 2800년에 걸친 철학의 아버지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부친살해의 원흉이 되었다.

그 역시 아들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주변의 모든 여자들을 거절하고 홀로 살면서 철저한 자기애로 자아팽창의 길을 걸었다.

니체는 2800년간 유지해 온 형이상학적 철학을 부수기 위해 신도 죽이고, 철학의 아버지들도 죽이고, 꿈꿀 수 없는 결혼으로 여자들도 죽이고 태어나 보지도 못한 자식들도 죽이고 난 후, 자신의 철학을 그릇마저 부숴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자기 앞에는 타자가 사라지고 모든 것을 자신의 몸 안에 다 담아내야 했다. 그래서 니체는 ‘초인’이 되고자 기획하였다.

니체의 자신만의 고유한 몸을 위한 기획의 결과는 비참했다.

1889년 전신마비 증세가 시작되어 니체 자신의 영혼을 죽었지만 자신의 ‘고유한 몸’은 11년을 더 살아야 했다.

“그의 육체는 살아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죽었던 것이다.”([칼 융, 자라투스트라는 분석하다], 80) 11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살면서 그의 영혼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의 육체만 살아있었다.

사람은 자아 혼자만의 발달을 이루고자 한다면, 니체처럼 자아팽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니체는 세계의 모든 사상을 뒤집은 결과 자기 자신도 뒤집히고 말았다.

니체는 모든 것을 해체한 결과 자기 자신도 해체되고 말았다.

니체는 모든 것을 죽였고, 그 결과 자기 자신도 죽였다.

자아는 발달하기 위해 타자를 통해 확장해 가야 한다.

내 안에 있는 핵심 인격인 ‘자기’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나만의 것이 아니요, ‘너와 나 그리고 우리’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물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온 세계와 그리고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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