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연장으로서 타자
나를 알아가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 바로 ‘자기’이다.
'자기'를 알지 못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바꿔 말하자면, 자기를 모르고 나를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란 개념은 설명하기에 너무나도 어려운 개념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자기'는 그렇게 어려운 개념이 아니면서, 일단 알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이해하기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사용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사용하는 부분부터 이해해 보자.
연인이나 부부간에 흔한 호칭 중 하나가 바로 ‘자기야!’이다.
그래서 ‘자기’라는 용어는 아무렇게나 사용하면 오해받기 십상이다.
상대방을 ‘자기’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곧 상대방은 ‘자신의 연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일심동체 부부관계에서는 '자기'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 외의 관계에서 '자기'라고 부르는 것은 많은 오해를 낳을 수 있다.
과거에는 ‘자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상대방을 나의 ‘자기’처럼 사용해 왔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목욕탕을 가면 혼자 등을 밀 수 없어 옆 사람에게 양해를 구한다.
‘제가 등을 좀 밀어 드려도 될까요?’ 옆 사람은 흔쾌히 동의하면서 등을 내어주는 것은 자신도 상대방의 등을 밀어주는 것에 대한 동의도 자동으로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사진을 찍을 때도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사진 찍어 주기를 부탁하면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흔쾌히 그 요구를 들어준다.
위의 두 경우 모두 대상을 자기의 연장으로 사용한 사례이다.
요즘 이런 풍속도가 달라지고 있다.
최근 셀프는 self-service개념으로 바뀌고 있다.
여수의 어느 목욕탕에는 때를 밀어주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어 등을 들이대고 스위치만 누르면 기계가 알아서 등을 밀어준다.
또 최근에 셀카가 등장하게 되면서 사진을 찍기 위해 대상을 자기로 연장해서 사용하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식당에 가면, 정수기 위에 "물은 셀프입니다"라고 써져 있다.
정수기의 등장으로 식당 종업원은 더 이상 물을 서비스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 다른 사례를 들자면, 핸드폰으로 인해 등장으로 셀카다.
자신을 사진 찍을 일 있으면, 셀카봉을 길게 늘어뜨려 자력의 힘으로 사진을 찍어낸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타자와의 접촉이 단절되어 가면서 자기의 개념도 축소되어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을 심리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현대인의 불안에서 오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 현상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 때문이지 타자가 변질된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타자는 안전하다.
오늘날에도 목욕탕에서 옆 사람에게 등을 밀어달라면 어느 누구든 흔쾌히 응해 줄 것이고,
내가 셀카로 찍을 수 있지만, 지나가는 사람에게 찍어 달라면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을 불러 준 것에 대해 즐겨 응해준다.
오히려 자신을 자기의 연장으로 활용해 주는 것에 기쁘고 반갑다.
특히 고교 동창들과 산행을 하면 단체 사진을 찍을 분위기가 되면, 지나가던 사람들 중에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에게 '사진사'의 역할을 맡겨 줄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각박해진 세상에서도 현대인의 자기로서 존재확인은 매우 유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건강한 사람이라면, 자아를 타자와 연장하여 상호 간에 연결성을 가지는 '자기'의 개념을 다 가지고 있다.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단지 '자기'의 개념으로서 알지 못할 뿐이다.
이렇게 '자기'는 우리의 삶 속에서 관계적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개념으로서 이해하고자 할 때부터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자기의 개념을 일반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본다.
가장 쉬운 것인데,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자기'의 개념이다.
이번에는 중학교 영어 문법 실력을 동원해서 '자기'의 개념을 이해해 보자.
학교에서 배운 영어에서 우리는 self를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대개 my-self, your-self, himself, herself, it-self, ourselves, them-selves 등 재귀대명사로 사용한다.
나, 너, 그, 그녀, 그들, 우리, 그것, 그것들 모두가 self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모두가 존재론적으로 ‘동등성’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나는 너를 통해서 너 안에 있는 나를 볼 수 있고, 나 안에는 네가 있어 나와 너는 같은 류의 존재임을 보여 준다.
여러 가지 재귀대명사는 하나로 대표할 수 있는 재귀 대명사 one-self이다.
self를 통해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고 self를 가진 모든 존재가 one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됨으로써 각 존재가 동등함을 주장할 수 있기도 하지만, 존재와 존재 간에는 분명한 구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 구별은 존재들 사이에 규범을 만들어 내고, 각 존재는 그 규범에 따라 도덕적 책임을 가지게 된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인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대표적 명작 Soi-même comme un autre(Oneself as Another, [타자로서 자기 자신])에서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어 모두 존재 안에 ‘나’와 ‘너’가 있을 수 있는 존재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다.
사람이 드라마나 영화에 깊이 빠져드는 이유는, 출연자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다 나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극 중 인물에게는 동일시가 일어나 마치 나를 대변하는 것 같지만, 어떤 극 중 인물은 보기만 해도 미워, 제발 '저 놈'은 극 중에서 안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소망까지 담는다.
그렇다면, 동일시가 일어난 인물뿐 아니라, 미운 저 극 중 인물의 성격 또한 내 안에 있는 미운 측면을 동일시하고 있는 셈이다.
모두 타자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나와 타자, 또는 극 중 인물 사이에 '자기'가 있어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자각이 일어날 때, 우리는 '반성하는 자기'가 된다.
self에 관한 간단한 용법 설명만 이해해도 ‘자기’가 ‘자아’와 어떻게 다르며, ‘근대적 주체’와 어떻게 구별되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지시하는 검지로 가리키면서, ‘너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다’라고 칭찬하거나 ‘너는 나쁜 사람이다’라고 화를 내거나 했다고 치자.
나머지 세 손가락은 나 자신을 가리키면서 ‘너는 사랑스럽다’ ‘너는 나쁘다’를 지시한다.
우리 각자는 이처럼 self로 연결되어 있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세배로 그 사랑이 내게로 돌아오게 되고, 누군가에게 화를 내면 나 자신이 세배로 되돌아와 나 자신을 파괴한다.
이처럼 우리의 존재는 self로 구조화되고 상호 연결되어 있다.